피임이 사치품 될 판... 콘돔 가격 30% 폭등 위기

2026-04-22 14:41

'안전한 성관계'의 비용이 오른다
세계 최대 제조사 인상 공식 경고

전 세계 콘돔 가격이 최대 30% 폭등할 위기에 처했다. 지정학이 전쟁터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사적 품목까지 건드리기 시작했다. 전쟁은 총과 폭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가 말레이시아 공장의 원자재 비용을 밀어올리고, 그 비용이 영국 약국 선반의 콘돔 가격표에 찍히는 것이 오늘날 글로벌 공급망의 현실이다.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사진. / 픽사베이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사진. / 픽사베이

세계 최대 콘돔 제조업체인 말레이시아의 카렉스(Karex)가 제품 가격을 최대 30% 인상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카렉스의 고 미아 키앗(Goh Miah Kiat) 최고경영자(CEO)는 21일(현지시각)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상황이 정말 불안정하고 가격이 비싸다"며 "지금 당장 비용을 고객에게 전가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CNN, 데일리비스트, 이란인터내셔널 등 주요 외신이 이를 일제히 보도하면서 콘돔 가격 급등 문제가 전 세계적 이슈로 부상했다.

연간 50억 개 이상의 콘돔을 생산하는 카렉스는 듀렉스(Durex)와 트로잔(Trojan) 등 세계적인 브랜드에 제품을 공급한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와 유엔(UN) 공중보건 프로그램에도 콘돔을 납품한다. 말 그대로 글로벌 피임 시장의 심장부다. 이 회사가 가격 인상 카드를 꺼내 든 것은 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공급망 붕괴 때문이다. 전쟁은 중동발 석유·가스 흐름을 교란했고, 그 여파는 콘돔 생산에 필수적인 원자재 공급망을 직격했다.

콘돔과 전쟁, 그리고 호르무즈 해협

콘돔이 전쟁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답은 석유화학 공급망에 있다. 콘돔의 주원료인 합성고무, 니트릴, 실리콘오일, 암모니아 등은 모두 중동산 석유화학 부산물에 의존한다. 이란 전쟁이 호르무즈 해협을 틀어막으면서 이들 원자재의 공급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 문제의 출발점이다.

CNN에 따르면 콘돔 포장재 제조에 쓰이는 나프타의 경우, 아시아 공급량의 41%가 중동에서 온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자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제조업체들이 원자재를 확보하지 못해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AI 툴로 만든 사진.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AI 툴로 만든 사진.

KPMG 글로벌 석유·가스 부문 책임자 앤지 길데아는 "원유나 디젤, 가솔린 얘기는 많이 나오는데, 피드스톡(feedstock: 석유화학 기초원료)과 석유화학 제품도 공급 부족 상태"라며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들이 원자재를 구하지 못하면 가격을 올려 손실을 보전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원자재만 문제가 아니다. 운송 지연도 심각하다. 고 미아 키앗 CEO는 "유럽과 미국으로 향하는 선적이 이전에는 약 한 달이 걸렸는데, 지금은 두 달 가까이 걸린다"고 밝혔다. 그는 "많은 콘돔이 배에 실려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데, 정작 그 제품들은 지금 당장 필요한 상황"이라며 "개발도상국들은 재고가 바닥나도 제품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걸려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얀마와 캄보디아 등 일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는 연료 배급제까지 시행되면서 베트남에서는 통학 비용이 너무 올라 학교가 재택 명령을 내린 사례까지 보고됐다.

원자재 위기에 물량 부족까지…수요는 30% 폭증

아이러니하게도 이 위기 속에서 콘돔 수요는 오히려 급증했다. 카렉스 측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콘돔 수요는 약 30% 증가했다. 공급은 줄고 수요는 느는, 최악의 수급 불균형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수요 급증의 배경 중 하나로는 미국의 해외원조 삭감이 꼽힌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예산을 대폭 줄이면서, 개발도상국에 공급되던 무상 콘돔 물량이 크게 감소했다. 그 결과 전 세계 콘돔 재고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상업적 수요가 그 공백을 메우려는 수요로 전환됐다는 분석이다. 데일리비스트는 "글로벌 콘돔 공급이 미국 주도의 해외원조 삭감으로 이미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이란 전쟁까지 터졌다"고 짚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때 선수들에게 무료로 배포됐던 콘돔. / 뉴스1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때 선수들에게 무료로 배포됐던 콘돔. / 뉴스1

인도의 경우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인도 매체들에 따르면 일부 지역 약국에서는 주요 브랜드 콘돔 재고가 사라졌으며, 가격이 최대 50%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인도는 케랄라주와 마하라슈트라주 등에 콘돔 제조 공장이 있지만, 이들 공장 역시 중동산 실리콘오일과 암모니아 공급 차질로 생산량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문가들은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 통행이 정상화되기 전까지는 수개월간 공급 부족이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트럼프 관세에 이미 휘청이던 콘돔 공급망

이란 전쟁 이전부터 글로벌 콘돔 공급망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으로 이미 압박을 받고 있었다. 2025년 미국이 '해방의 날 관세(Liberation Day Tariffs)'를 발동하면서 베트남산 수입품에 46%, 중국산 수입품에 최대 145%에 달하는 고율 관세가 부과됐다. 콘돔 생산의 상당 부분이 동남아시아에 집중돼 있다는 점에서 이 관세 폭탄은 업계 전반에 15~30%의 생산 비용 상승을 불러왔다.

시장조사업체 코그니티브 마켓 리서치(Cognitive Market Research)에 따르면 이 같은 관세 충격은 특히 중소 브랜드에 치명적이었다. 미국이 주요 생산 허브인 아시아산 완제품과 원자재에 동시에 관세를 부과하면서, 공급망 다변화에 투자할 여력이 없는 소규모 업체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일부 대형 업체들은 라틴아메리카나 동유럽 등 새로운 생산 거점을 모색하거나 자동화 설비 투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했지만, 이런 구조적 전환에는 시간이 걸린다.

이 상황은 콘돔 업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CNN에 따르면 의료용 장갑 제조업체들도 같은 이유로 공급망 병목 현상을 우려하고 있다. 석유화학 기반 원자재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의료·위생용품 산업 전반이 중동 에너지 흐름 교란에 취약하다는 사실이 이번 사태로 재확인됐다.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사진. / 픽사베이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사진. / 픽사베이


"안전한 섹스가 사치품이 될 판"…공중보건 위기 우려

가격 폭등이 단순한 소비자 불편을 넘어 공중보건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콘돔은 성병 예방의 핵심 도구다. 특히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 개발도상국에서는 저렴한 콘돔 보급이 성병 확산 억제에 직결된다.

케냐의 경우 USAID 원조 삭감 이후 극심한 콘돔 부족 사태를 겪었다. 케냐 국가에이즈통제위원회(NACC) 자료에 따르면 HIV, AIDS 예방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무상 콘돔 공급이 크게 줄어들면서 보건 당국이 긴급 대응에 나섰다. 인도 전문가들도 "콘돔 가격이 50% 오르면 저소득층 소비자들이 구매를 포기할 수 있으며, 이는 성병 확산 위험으로 직결된다"고 경고했다.

고 미아 키앗 CEO는 향후 몇 달치 공급 물량은 확보한 상태이며, 수요 증가에 대응해 생산량을 늘리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중동발 에너지·석유화학 흐름 교란이 지속되는 한 글로벌 공급망의 압박은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콘돔 한 박스의 가격이 얼마나 더 오를지도 예측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말레이시아 포트클랑에 본사를 두고 130개국 이상에 제품을 수출하는 카렉스는 콘돔 외에도 개인용 윤활제, 의료용 장갑, 의료 카테터 등을 생산한다. 연간 50억 개 이상의 콘돔을 찍어내는 이 회사의 가격 인상 결정은 듀렉스, 트로잔 등 소비자들이 약국과 편의점에서 흔히 접하는 브랜드 제품 가격에 직접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영국 NHS와 유엔 프로그램에 납품되는 공공 물량 가격도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까닭에 각국 보건 당국의 예산 부담도 커질 전망이다.

home 채석원 기자 jdtimes@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