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과 재봉쇄를 둘러싼 잦은 번복과 혼란이 이란 내부의 심각한 권력 다툼을 고스란히 시사한다.
이로 인해 미국의 대이란 협상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험난해진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일(현지 시각) '미국은 어떤 이란과 협상 중인가'라는 제목의 심층 기사를 통해 이란에서 나온 호르무즈 해협 관련 상반된 메시지는 현재 이란에 상황을 하나로 통제할 절대적인 최고지도자가 없는 상태로 치열한 권력 다툼이 진행 중이라는 명백한 징후라고 보도했다.
한 중동 전문가는 현재 이란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 당시 첫 수개월간 나타났던 무정부 상태의 혼돈과 닮은 권력의 정글에 비유했다.
현재 이란 관영 언론들은 이란 고위 당국자들이 미국과 평화 회담을 재개할 우호적인 분위기가 아니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설령 이런 부정적인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정작 미국 측에서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Islamabad)에 마련된 협상 테이블에서 도대체 이란의 어느 세력과 진짜 협상을 진행해야 하는 건지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될 것이라고 날카롭게 짚었다. 이란을 대표하는 단일화된 목소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심한 내부 긴장과 분열은 1차 협상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겉으로 드러났다. 원래 대미 협상에 나서는 이란 대표단은 그동안 내부의 철저한 통제와 꼼꼼한 사전 준비를 거친 정예 소규모 인원으로 구성되곤 했다.
하지만 지난 11일과 12일에 걸쳐 열린 협상에서는 이례적으로 결정권자급 간부만 30명에 달하는 총 80명의 거대 대표단이 파견됐다. 2015년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와 역사적인 핵 합의를 이룬 온건 성향의 중견 외교관 마지드 타흐트 라반치부터 미국에 대한 조롱을 일삼고 전쟁 불사를 외치는 강경파 마흐무드 나바비안까지 성향이 완전히 상반된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협상 전략을 두고 서로 격렬한 내부 논쟁을 벌였다. 이 탓에 협상 중재를 맡은 파키스탄 측이 미국을 상대하고 설득하는 것보다 갈라진 이란 대표단을 중재하고 상대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한 것으로 전해졌다.
[권력의 진공 상태와 세력 간의 좁혀지지 않는 시각차]
이란 내부 혼란의 가장 큰 최대 원인은 최고 수뇌부의 심각한 공백이다. 이란의 절대 권력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사망한 지 7주가 지나도록 공식적인 장례식 일정조차 잡지 못할 정도로 내부 권력 투쟁이 치열하다. 유력한 후계자인 아야톨라 모즈타바 하메네이 역시 행방이 묘연하며 지속해서 신변 이상설이 제기된다.
더욱이 이스라엘과의 오랜 전쟁과 군 수뇌부에 대한 연쇄 암살로 군부 내 최고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던 충성파의 층이 눈에 띄게 얇아졌다. 지난 8일 일시적 휴전 선언 후로는 외부의 적을 향했던 이란 정권의 전시 결속력마저 약화하며 각 세력이 각자도생하는 양상을 띤다.
공식적으로 현재 협상과 관련된 권력을 쥐고 있는 기구는 최고국가안보회의다. 이를 주도하는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의장이 협상의 수석대표를 맡고 있으며 아바스 아라그치 외무장관이 그를 든든하게 뒷받침한다. 이들은 실용적인 관점에서 제재 해제를 목표로 협상에 임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의 협상 의지는 이란 내 초강경 무력 집단인 이슬람혁명수비대를 중심으로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군부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공격적으로 변한다. 혁명수비대와 긴밀히 연계된 조직이 매일 밤거리로 동원하는 친정부 시위대는 갈리바프 의장과 아라그치 장관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며 타협적인 태도를 맹비판한다.
최근 열린 시위 현장에서 엄격한 이슬람 율법을 어기고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이 버젓이 구호를 선창하는 모습이 목격된 일이나, 내달 1일로 예정됐던 지방선거가 종전 60일 뒤로 기약 없이 미뤄진 것도 군부가 사회 전반의 통제력을 쥐고 흔든다는 강력한 징후로 해석된다.
[이해관계와 이념의 충돌 그리고 위협받는 협상의 미래]
이코노미스트는 현실 정치의 실리와 국익을 우선 주장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종교적 이념과 명분을 중시하는 이슬람 혁명주의자 사이의 오랜 균열에 더해 막대한 물질적 이해관계까지 복잡하게 얽히면서 상황은 더 풀기 어렵게 꼬였다고 짚었다.
혁명수비대 소속의 일부 장성들은 오랜 기간 이어진 미국의 경제 제재를 몰래 우회하는 작전을 통해 밀수를 주도하며 막대한 부와 쏠쏠한 이득을 챙겨온 것으로 알려졌다. 제재가 풀리면 이들의 검은 수입원이 사라지는 셈이다.
반면 모즈타바 하메네이나 갈리바프 의장과 끈끈하게 연결된 네트워크는 외국에 막대한 부동산 포트폴리오를 은밀히 관리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으며 제재 해제로 자금을 양성화하려는 동기를 지닌 것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근본적 차이로 인해 각 세력은 협상의 최대 쟁점들에서 전혀 좁혀지지 않는 상반된 견해를 고수한다. 중동 전역에 퍼진 이란의 대리 세력을 놓고 민족주의자들은 미국과 제재 해제를 맞바꿀 유용한 협상 카드로 여기지만, 이슬람주의자들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저항의 핵심 중추로 우대한다.
민족주의자들은 무모한 핵 위기 고조를 자칫 외부의 치명적인 군사 공격을 유도하는 위험한 일로 여기지만, 이슬람주의자들은 외부 세력의 간섭을 막는 확실한 억지력을 위해 아예 핵무기 개발을 완성하는 북한 모델을 따르고자 한다.
세계 원유 수송의 목줄인 호르무즈 해협 통제를 두고도 실용주의자들은 걸프 지역 이웃 국가들과의 유리한 안보 협정을 끌어낼 지렛대로 활용하려 하지만, 이념주의자들은 지나가는 상선들로부터 막대한 통행료를 걷을 수 있는 매력적인 톨게이트 부스로 여긴다.
이코노미스트는 "미국과 협상이 진행돼 이란이 다시 협상장으로 복귀하더라도 이란 대표단 내에 깊게 팬 이념적이고 물질적인 분열은 협상 타결 자체를 매우 어렵게 하고 있다. 또 천신만고 끝에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이란 내부의 반발로 합의가 빠르게 와해될 수 있다"고 날카롭게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