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일 계기 '석주 이상룡' 재조명한다

2026-04-17 09:40

경상북도호국보훈재단, 공적 재검증 본격화
선생의 정치적 지도력과 역사적 기여도를 고려할 때, 현재 공적의 범위와 위상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 요구돼

석주 선생 공적 재심사 국민청원에 참여하는 시민/(재)경상북도호국보훈재단 제공
석주 선생 공적 재심사 국민청원에 참여하는 시민/(재)경상북도호국보훈재단 제공

[대구경북=위키트리]이창형 기자=대한민국 임시정부 체제에서 초대 국무령(1925.9~1926.1)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 선생은(1858~1932, 독립장)은 독립운동의 조직적 기반을 구축하고 노선과 방향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은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인재 양성에 앞장섰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운영 체계 확립에 기여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기존 공적 심사 과정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활동과 역할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어, 공적에 대한 보다 정밀한 검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재)경상북도호국보훈재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일을 계기로, 국권 상실 속에서도 민주공화국의 기틀을 세우고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한 선생의 공적에 대한 역사적 의미 재조명 활동에 들어갔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과 역사적 위상을 재조명하고, 공적 재검증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지속적으로 확산해 나가고 있다.

먼저 경술국치 이전 선생이 전개한 1896년 안동의병 자금 지원과 1905년 가야산 의병기지 구축은 항일의병 조직화와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에도 불구하고, 공훈록에는 그 구체성과 비중이 충분히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만주 망명 이후 설립한 길남장과 마록구농장은 병농일치 체계에 기반한 독립군 양성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며 독립전쟁 수행의 토대를 형성했으나, 이 역시 공적 서술에서 제한적으로 반영돼 있다.

특히 1921년 북경군사통일회의에서 대조선공화국 대통령으로 추대된 사실은 선생이 당대 독립운동 진영에서 차지했던 정치적 위상과 지도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충분히 평가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미반영 또는 제한적으로 서술된 공적들은 이상룡 선생이 의병투쟁 준비 단계부터 만주 독립운동 기지 건설, 그리고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따라서 선생의 정치적 지도력과 역사적 기여도를 고려할 때, 현재 공적의 범위와 위상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요구된다.

재단은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단순한 서훈 상향 요구가 아닌, 공적의 범위와 기여도를 객관적으로 재검증하는 데 중점을 두고 '독립유공자 공적 재심사 추진단'을 운영 중이다.

한편, 지난 3월 30일 국회의원회관에서는 독립유공자 훈격 재평가 및 제도개선을 위한 정책 토론회가 열리며 공적 재검증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바 있다.

이러한 정부차원의 논의는 지역사회에서 제기되어 온 문제의식과 맞물려 확산되고 있다.

특히 지난 2월 11일 안동 유림들이 독립운동가 20인에 대한 서훈 재평가를 요청한 ‘영남만인소’와 지난해 12월 출범한 재단의 ‘독립유공자 공적 재심사 추진단’ 활동이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경북 지역은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이상룡 선생은 지역을 넘어 전국 독립운동을 이끈 핵심 인물이다.

이에 따라 석주 선생의 역사적 재평가와 공적 재검증에 대한 지역사회의 공감과 열망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희원 재단 대표이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일은 단순한 역사 기념일을 넘어 독립운동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라며 “이상룡 선생의 공적을 객관적으로 재조명하는 과정은 상훈제도의 신뢰를 높이고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밝혔다.

고성이씨 종택 ‘임청각’의 과거 행사 모습/안동시
고성이씨 종택 ‘임청각’의 과거 행사 모습/안동시

한편, 경북 안동에 있는 고성이씨 종택 ‘임청각’은 석주 선생이 출생한 곳이다.

대한민국 보물 제182호로도 지정됐으며, 독립유공자 11명을 배출하며 일제강점기 항일 투쟁의 밑거름이 됐다.

선생은 1910년 일제가 한일합병을 감행하자 1911년 당시 54세에 50여 명의 가솔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했다.

석주 이상룡은 "공자·맹자는 시렁 위에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라고 했다.

사당의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문서도 불태웠다.

무장독립투쟁 자금이 부족하자 아들을 다시 안동으로 보내 임청각을 2천 원에 일본인 오카마 후사지로에게 팔고 군자금으로 보탰다.

얼어붙은 만주 땅에서 백만 동포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며 항일 독립운동단체 경학사를 만들어 독립정신을 일깨우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1925년 석주 이상룡은 초대 국무령을 맡았으나 다시 간도로 돌아와 무장 항일투쟁에 심혈을 기울였다.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2년 5월 길림성 서란현에서 74세에 순국했다.

석주 일가는 이상룡을 비롯해 부인 김우락, 동생 이봉희, 아들 이준형, 조카 이광민, 손자 이병화, 손자며느리 허은 등 3대를 거쳐 모두 11명의 독립운동 서훈자를 배출했다.

home 이창형 기자 chang@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