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잡혀도 끝나버리는 수사”…필리핀서 한국인이 범죄 표적 되는 이유

2026-04-13 21:46

- 2025년 살인 3412건·강도 3645건…강력범죄 여전
- 단기 체류·미약한 후속 수사…“한국인은 리스크 낮은 표적” 인식
- “범죄는 우발처럼 보여도 표적은 계산으로 정해진다”

한국인 관광객에게 수면제나 약물을 탄 음료를 권해 정신을 잃게 만든 뒤 거액의 달러와 페소 금품을 강탈한 후 호텔 복도를 태연하게 걸어가는 범죄자는 CCTV 에 자신의 모습이 촬영되어도 전혀 신경도 안쓴다. / 사진제공=약물 강도 피해자
한국인 관광객에게 수면제나 약물을 탄 음료를 권해 정신을 잃게 만든 뒤 거액의 달러와 페소 금품을 강탈한 후 호텔 복도를 태연하게 걸어가는 범죄자는 CCTV 에 자신의 모습이 촬영되어도 전혀 신경도 안쓴다. / 사진제공=약물 강도 피해자

[전국=위키트리 최학봉 선임기자] 필리핀에서 한국인 관광객이 반복적으로 범죄 표적이 되는 배경에는 단순한 치안 불안을 넘어, 사건이 발생해도 수사와 처벌이 끝까지 이어지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가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필리핀 경찰 발표에 따르면 2025년 한 해 동안 살인 3412건, 강도 3645건 등 강력범죄는 여전히 상당한 수준을 유지했다. 전체 범죄 건수는 감소세를 보였지만, 관광객이 체감하는 위험까지 낮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한국인을 겨냥한 강력범죄도 이어지고 있다. 2025년 필리핀 앙헬레스에서는 한국인 관광객이 오토바이 강도의 총격을 받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마닐라에서 한국인 한 명이 무장 강도에게 납치되었다가 20일 만에 풀려나는 사건이 있었다. 앞서 2024년에도 소매치기 과정에서 한국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고, 이후에도 유사 범죄가 반복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특정 시기에 그치지 않고 수년간 비슷한 사건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를 단순한 우발 범죄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기자가 직접 겪은 사례 역시 이 같은 현실을 보여준다.

필리핀의 한 카지노 호텔에서 강도 피해를 당해 현지 경찰에 신고했지만, CCTV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관할 경찰서장의 공문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즉각적인 확인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수사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피해자가 교민 도움을 받아 용의자 관련 정보를 확보해 전달했음에도, 경찰은 추가 입증 자료를 요구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 피해자의 설명이다.

문제의 핵심은 사건 발생 이후의 구조에 있다.

한국인 관광객은 대부분 단기간 머물다 귀국한다. 법적으로 사건이 자동 종료되는 것은 아니지만, 피해자가 출국하는 순간 수사 동력은 급격히 약화되고 재판과 처벌까지 이어지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된다.

현지 교민 사회에서도 “피해자가 귀국하면 사건이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체감 치안 불안은 공식 통계보다 더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마닐라 말라테에 거주하는 한 교민은 “강도나 절도 피해를 당하고도 신고하지 않는 사례가 하루 수십 건에 달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온다”며 “신고를 해도 해결이 어렵다는 인식, 언어 장벽, 귀국 일정 부담까지 겹치면서 신고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이처럼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미신고 범죄까지 감안하면 실제 위험도는 더 높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무엇보다 이 같은 현상이 반복되는 배경에는 범죄자들의 ‘리스크 계산’이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범죄는 겉으로는 우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대상을 고르는 단계에서부터 계산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 일본 관광객의 경우 사건 발생 시 자국 정부나 조직 차원의 대응이 뒤따르고, 경우에 따라 외교적 부담과 수사 압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인식이 현지에 형성돼 있다. 반면 한국인 관광객은 정부의 소극적 대응과 단기 체류 후 귀국하는 경우가 많아 수사가 장기적으로 이어지기 어렵고, 처벌로 연결될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낮다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결국 범죄자 입장에서는 한국인이 ‘소비력은 있지만 끝까지 쫓아오지 않는 대상’으로 비칠 수 있고, 이런 구조가 반복적인 범죄 표적화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범죄는 우발처럼 보이지만, 표적은 계산으로 정해진다. 그리고 그 계산에서 한국인이 선택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을 겨냥한 왜곡된 표현까지 등장하고 있다. 교민들 사이에서는 일부 범죄자들이 한국인을 두고 ‘맛살라 코리안’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쉽게 노릴 수 있는 한국인을 뜻하는 비하성 표현이 범죄 현장 주변에서 회자된다는 것이다.

외교적 대응의 한계도 지적된다. 우리 외교당국은 해외에서 강도 등 범죄 상황이 발생할 경우 “저항하지 말고 즉시 벗어날 것”을 기본 행동 요령으로 안내하고 있다.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라는 점에서는 필요하지만, 사건 이후 수사 지원과 피해 회복 과정에서 체감되는 대응은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한 한국 수사기관은 해외에서 직접적인 강제 수사권을 행사할 수 없고, 이른바 ‘코리안 데스크’ 역시 현지 수사기관과의 협조 요청 수준에 머무는 한계가 있다.

결국 범죄는 현지에서 발생하지만, 피해자는 충분히 보호받기 어렵고 수사는 완결되기 힘든 구조가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잡혀도 끝나지 않는 범죄가 아니라, 잡혀도 끝나버리는 수사…그 공백이 한국인을 표적으로 만든다.”

전문가들은 한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대해 실질적인 수사와 처벌이 가능하도록 제도적 보완과 국가 간 공조 강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마닐라 한인회 관계자는 “현재와 같은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 한 여행객 스스로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며 “치안 리스크가 높은 지역에 대해서는 여행을 신중하게 판단하거나, 필요할 경우 일정 자체를 자제하는 방안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필리핀 여행이 모든 경우에 곧바로 위험으로 직결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과 같은 구조 아래에서는 한국인 관광객이 범죄의 쉬운 표적으로 인식될 가능성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나온다.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필리핀 여행은 ‘낭만’이 아니라 ‘위험 관리’의 관점에서 다시 판단해야 할 시점이다.

home 최학봉 기자 hb7070@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