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물러가고 대지에 온기가 스미면 몸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한다. 4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중장년층에게 이 무렵은 생활 리듬이 달라지는 시기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이 풀리고 활동량이 늘어나는 만큼, 식탁에도 그에 맞는 활력이 필요해진다. 춘곤증으로 쉽게 지치기 쉬운 때에는 제철 음식이 더욱 반갑다. 익숙한 겨울 음식보다 지금만 누릴 수 있는 계절의 맛을 찾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행에서는 어디를 가느냐만큼 무엇을 먹느냐도 중요하다. 들과 산에서 올라온 나물, 산란기를 앞두고 맛과 영양이 오른 해산물은 이때만 맛볼 수 있는 별미다. 남쪽에서 시작된 제철의 맛이 전국으로 퍼지는 지금, 한 끼를 따라 몸과 마음을 채우는 여정을 떠나볼 만하다. 풍경과 식탁이 함께 기억에 남는 계절, 전국 각지 제철 음식과 함께 걷기 좋은 여행지를 권역별로 소개한다.
1. 전라도 : 미식의 본고장, 바다와 강이 교차하는 생명력의 정점
전라도의 봄은 물길에서 시작된다. 섬진강 하구와 여수의 바다는 이 시기 맛과 영양의 변화가 또렷한 곳이다. 강과 바다가 맞닿는 자리에 오르면 식재료의 결도 한층 다채로워진다.
■ 지친 중년을 깨우다…섬진강 '벚굴'
섬진강 하구에서 자라는 벚굴은 4월부터 5월까지가 맛과 영양의 정점이다. 벚꽃이 필 무렵부터 가장 맛이 든다 하여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늦봄까지 크기가 더욱 커지고 영양도 알차게 오른다. 일반 굴보다 서너 배 큰 크기에서 오는 만족감이 크고, 단백질과 아연이 풍부해 중년의 활력 증진에도 도움을 준다. 5월까지도 특유의 담백한 풍미가 이어져 늦은 봄 여행객들 발길을 붙잡는 별미다.

■ 봄 바다 기운을 담다, 고흥·여수 주꾸미
4월 중순부터 5월까지 전남 고흥과 여수 앞바다는 주꾸미가 주인공이다. 특히 알이 꽉 찬 봄 주꾸미는 타우린 성분이 낙지나 오징어보다 풍부해 피로 해소와 기력 보충이 필요한 4060 세대에게 반가운 식재료다. 살짝 데쳐 숙회로 먹거나 샤브샤브로 즐기면 야들야들한 식감과 고소한 맛이 잘 살아난다. 저칼로리 고단백 식품이라 건강 관리에 신경 쓰는 중년층도 부담 없이 즐기기 좋다.
■ 물길 따라 걷는 봄날의 고요한 산책

벚굴을 찾아 떠난 길이라면 광양 망덕포구와 인근 섬진강변 산책로를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좋다. 섬진강의 끝자락에서 바다와 만나는 포구의 풍경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주꾸미를 맛본 뒤에는 여수 오동도의 동백 숲길을 걷는 코스가 잘 어울린다. 화려한 꽃의 시기가 지나고 난 뒤의 숲길은 한결 고요하고, 식사 뒤 여운을 천천히 가다듬기에도 좋다. 조금 더 고즈넉한 시간을 원한다면 고흥의 쑥섬(애도)도 괜찮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바다 위 정원을 걷는 듯한 풍경은 그 수고를 충분히 덜어준다. 다도해를 배경으로 핀 야생화도 이 계절의 볼거리다. 식사와 산책을 한 호흡으로 묶어 즐기기 좋은 점도 전라도 봄 여행의 장점이다.
2. 경상도 : 거친 파도를 이겨낸 강인한 봄의 맛
경상도의 봄 미식은 바다 기운이 선명하다. 동해와 남해를 잇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식재료들은 중년의 혈관과 뼈 건강에 도움을 주는 맛으로 이어진다. 활기 있는 항구와 담백한 식재료가 함께 기억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 기장 대변항의 역동, 봄 멸치
4월과 5월 기장 대변항은 멸치털이 작업으로 활기가 돈다. 흔히 아는 마른 멸치와 달리, 이 시기 봄 멸치에는 손가락만큼 굵고 살이 올라 ‘바다의 돼지고기’라는 별칭도 붙는다. 칼슘과 인이 풍부해 골다공증 예방이 필요한 4060 세대에게 반가운 식재료다. 멸치회무침의 새콤달콤한 맛은 겨우내 잃었던 입맛을 되찾아 주고, 소금구이로 즐기면 고소한 맛이 또렷하다. 찌개로 끓이면 바다의 감칠맛이 깊게 배어난다. 같은 멸치라도 조리법에 따라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봄 멸치의 장점이다.

■ 청도 미나리와 창원 미더덕의 조화
경북 청도 화악산 자락에서 자란 미나리는 4월까지가 절정이다. 아삭한 식감과 강한 향은 몸속 노폐물 배출에 도움을 준다. 여기에 경남 창원 진동면에서 생산되는 미더덕을 곁들이면 맛의 결이 한층 깊어진다. 4월 미더덕은 알이 크고 향이 가장 진하며,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해 혈행 개선에도 이롭다. 예부터 미나리는 혈압을 낮추고 열을 내리는 성질이 있는 식재료로 여겨졌다. 건강 관리에 신경 써야 하는 중년층이 봄철 식탁에서 꾸준히 찾는 이유다. 향이 또렷한 미나리와 바다 내음이 살아 있는 미더덕은 봄철 밥상에서 특히 잘 어울린다.
■ 바다와 읍성에 머무는 시간

기장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갈맷길은 바다를 곁에 두고 걷기에 좋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몸도 서서히 풀리는 느낌이 든다. 미나리의 고장 청도에서는 청도읍성을 권할 만하다. 낮은 성곽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는 평탄해 무릎에 무리가 덜하고, 옛 성곽의 분위기는 마음을 한결 느긋하게 만든다. 성벽 너머로 펼쳐진 전원 풍경도 오래 머물고 싶게 한다. 미더덕으로 유명한 창원을 찾았다면 진해 내수면환경생태공원을 들러보는 것도 좋다.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숲과 저수지가 어우러진 길을 걷다 보면 봄 공기가 한층 또렷하게 느껴진다. 식사 뒤 가볍게 둘러보기 좋은 코스라는 점에서도 부담이 적다.
3. 충청도 : 갯벌이 내어준 찰나의 보약
충청도 서해안의 봄은 짧은 제철이 주는 매력이 선명한 계절이다.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식재료들이 여행객 발길을 붙잡고, 때를 맞춰 찾아가는 재미도 크다.
■ 봄날의 귀한 보약, 서천 실치
충남 서천과 당진 지역에서 4월 한 달간만 맛볼 수 있는 실치는 베도라치의 치어다. 5월만 되어도 뼈가 굵어져 회로 먹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이 시기 실치는 말 그대로 때를 맞춰야 하는 봄 별미다. <본초강목> 등 옛 문헌에는 작은 물고기가 뼈 건강에 이롭고 성질이 평이해 소화에 좋다고 적혀 있다. 실치는 칼슘 함량이 높아 뼈 건강을 챙기려는 이들에게 특히 잘 맞는다. 오이와 깻잎을 넣어 무친 실치회는 부드럽게 넘어가고, 중년의 위장에도 부담이 덜하다. 짧은 제철이 주는 선명한 계절감도 실치가 오래 기억되는 이유다.

■ 서해의 봄을 완성하는 태안 암꽃게
5월의 주인공은 암꽃게다. 산란을 앞두고 노란 장이 꽉 찬 암꽃게는 영양가가 높다. 꽃게에 풍부한 타우린은 간 기능을 돕고 피로를 푸는 데 유용하다. <자산어보>에서는 게를 “맛이 매우 달고 맛있다”라고 기록했다. 게장으로 먹어도 좋지만, 봄 꽃게 특유의 단맛을 가장 또렷하게 느끼기에는 찜이 잘 맞는다. 뽀얀 속살에 담긴 바다의 풍미가 식탁을 풍성하게 채운다. 살의 결이 살아 있어 한입씩 떼어먹는 만족감도 크다.
■ 갈대밭과 숲에서 누리는 평온

서천에 머문다면 신성리 갈대밭을 거닐어보자. 봄바람에 서걱거리는 갈대 소리는 귀를 맑게 해준다. 당진에서는 폐교를 예술 공간으로 바꾼 아미미술관도 들러볼 만하다. 정원과 작품이 어우러진 풍경은 중년의 감성을 차분하게 채워준다. 태안으로 향한다면 안면도수목원이 제격이다. 5월의 수목원은 초록의 밀도가 높아져 눈의 피로를 덜고 깊은 호흡을 유도한다. 곧게 뻗은 안면도 소나무 숲길 사이로 스며드는 봄볕도 이 계절의 즐거움이다. 바다와 숲, 예술 공간을 함께 둘러보기 좋은 점도 충청권 봄 여행의 매력이다.
4. 강원도 : 산의 정기를 집약한 초록의 성찬
바다의 봄이 풍요롭다면, 강원도 산간의 봄은 응축된 기운으로 다가온다. 척박한 땅과 추위를 견디고 올라온 나물들은 그 자체로 봄의 힘을 품고 있다. 한 끼 식사만으로도 산지의 계절감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 산채의 제왕, 두릅의 품격
4월 말부터 5월 초 강원도 깊은 산에서 채취하는 참두릅은 '산채의 제왕'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특유의 쌉싸름한 맛을 내는 사포닌 성분은 면역력 강화와 활력 보충에 도움을 준다. 옛 문헌에서도 두릅은 정신을 안정시키고 몸의 기운을 돕는 식재료로 기록돼 있다. 특히 나른한 춘곤증을 이겨내야 하는 중년층에게 제철 보양식으로 잘 맞는다. 살짝 데친 두릅을 초고추장에 곁들이면 강원 산지의 싱그러운 맛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다.

■ 정선·평창의 곰취와 곤드레
5월 강원도 대표 봄나물로는 곰취를 빼놓기 어렵다. 곰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찾아 먹는다고 해서 이름 붙은 곰취는 베타카로틴과 비타민 C가 풍부해 노화 방지에 이롭다. 정선의 곤드레나물은 섬유질이 풍부해 중년의 장 건강에 도움을 준다. 고산지대 큰 일교차를 견디며 자란 나물들은 평지의 것보다 향이 짙고 식감도 분명하다. 곤드레밥 한 그릇에 곰취쌈을 곁들이면 강원 산나물 특유의 매력을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다. 입안에 남는 향이 길어 식사 뒤에도 여운이 선명하다.
■ 파노라마 산맥과 전나무 숲의 위로

정선 가리왕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겹겹이 이어진 산맥의 풍경이 펼쳐진다. 발 아래 펼쳐진 초록 물결은 답답했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준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대지의 모습은 일상에서 쌓인 생각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평창에서는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걷는 것을 추천한다. 수백 년 된 나무 사이를 따라 난 길은 천천히 걷기 좋고, 피톤치드 가득한 숲의 공기는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흙길을 밟는 감각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속 소음도 조금씩 잦아든다. 산나물 한 끼 뒤 숲길 산책까지 더하면 강원 봄 여행의 호흡이 한층 또렷해진다.
5. 제주도 : 가장 먼저 당도한 봄의 갈무리
제주는 봄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다. 현무암 사이를 뚫고 올라온 제주 식재료는 육지의 것과는 다른 결의 힘을 지닌다. 그래서 같은 봄 식재료라도 제주에서는 맛의 인상이 조금 다르게 남는다.
■ 고사리 장마와 한라산 고사리
4월 제주에는 ‘고사리 장마’라 불리는 안개비가 내린다. 이 비를 맞고 자란 고사리는 ‘산에서 나는 소고기’라 불릴 만큼 식감이 좋고 귀하게 여겨졌다. 조선 시대에는 제주 고사리를 임금의 수라상에 올리는 진상품으로 썼다. 식이섬유가 풍부해 콜레스테롤 수치 관리에 도움을 주는 만큼, 성인병 예방이 중요한 4060 세대에게도 반가운 식재료다. 제주 고사리 육개장의 걸쭉하고 구수한 맛은 여행 중 쌓인 피로를 풀어준다. 봄비와 함께 자란 고사리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도 제주 봄 식탁의 인상을 깊게 만든다.

■ 제주 봄 바다 한 그릇, 청량한 '자리돔물회'
4월 말부터 서귀포 보목항을 중심으로 자리돔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뼈째 먹는 것이 특징인 자리돔은 칼슘이 풍부해 중년의 뼈 건강 관리에 도움이 된다. 된장을 베이스로 한 제주식 자리물회는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구수한 풍미를 내어,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는 시기에 부담 없이 즐기기 좋다. 거친 파도를 견디며 자란 자리돔의 단단한 육질은 씹을수록 고소한 맛을 더하며 여행의 여운도 길게 남긴다.
■ 현무암 돌담 너머 보이는 푸른 바다

제주에서는 서귀포 건축문화기행 코스를 따라 걸어보길 권한다. 이중섭거리를 지나 소라의 성으로 이어지는 길은 제주 역사와 예술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코스다. 제주 돌담과 낮은 지붕이 이어지는 풍경도 여행의 맛을 더한다. 혹은 제주 올레길 7코스 일부를 골라 걸어보는 것도 좋다. 외돌개 부근의 절벽과 푸른 바다는 식탁에서 이어진 봄의 감각을 풍경으로 확장해 준다. 자리돔의 고장 보목항 부근에서 시작하는 섶섬지기길은 한가로운 어촌 마을 정취를 느끼기에 잘 어울린다. 먹거리와 풍경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점도 제주 봄 여행의 강점이다.
[에필로그] 나를 돌보는 가장 맛있는 방법
여행을 떠나면 보통 무엇을 보았는지에 먼저 마음이 간다. 하지만 4060세대의 봄 여행에서는 무엇을 먹고, 무엇으로 몸을 채웠는지도 중요하다. 전국 봄철 미식 지도를 따라가는 여정은 입맛을 돋우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겨울의 묵은 기운을 털어내고, 계절이 내어준 생명력을 몸 안에 들이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잘 먹는 일이 곧 잘 쉬는 일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제철 식재료에 담긴 영양과 그 속의 생활 지혜 그리고 그 땅의 역사와 풍경이 어우러진 이 기행은 중년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더한다. 봄의 정수를 담은 한 끼는 오늘의 피로를 덜고 내일의 기운을 채우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지금 전국 곳곳에는 계절이 가장 먼저 내어주는 맛이 올라와 있다. 입맛이 아니라 기운을 얻으러 이제 길을 나설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