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신살 뻗친 트럼프… 헝가리 16년 만에 정권교체

2026-04-13 16:24

트럼프가 찍은 오르반, 헝가리 민심에 찍혔다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 / 빅토리 총리 인스타그램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 / 빅토리 총리 인스타그램

'유럽의 트럼프'로 불리며 극우 민족주의 노선을 걸어온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가 12일(현지시각) 치러진 총선에서 야당에 대패하며 16년 만에 권좌에서 물러나게 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 지지하고 JD 밴스 부통령까지 직접 헝가리를 찾아 지원사격에 나섰지만 역풍을 맞았다.

헝가리 국가선거위원회에 따르면 개표율 97.74% 기준으로 야당 티서(Tisza)당이 전체 199석 중 138석을 차지했다. 득표율은 53.6%였다. 반면 오르반 총리가 이끄는 여당 피데스(Fidesz)는 37.8%를 얻어 55석에 그쳤다. 티서당은 당초 헌법 개정과 독자적인 정책 추진이 가능한 이른바 '매직 넘버'인 3분의 2 의석(133석)을 목표로 내걸었는데 이를 훌쩍 넘겼다. 이번 총선 투표율은 80%에 육박해 헝가리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오르반 총리는 "승리 정당에 축하 인사를 건넸다"며 패배를 인정했다. 2010년 집권 이후 줄곧 선거에서 연승을 거듭하며 '불패 신화'를 써온 오르반 총리로서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까지 직접 헝가리를 찾아     오르반 빅토르 총리    지원사격에 나섰지만 역풍을 맞았다. /    빅토르 총리 인스타그램
JD 밴스 미국 부통령까지 직접 헝가리를 찾아 오르반 빅토르 총리 지원사격에 나섰지만 역풍을 맞았다. / 빅토르 총리 인스타그램

머저르 페테르 티서당 대표는 다뉴브 강변에서 열린 승리 축하 행사에서 환호하는 지지자들을 향해 "오늘 밤 진실이 거짓을 이겼다"며 "오늘 우리가 승리한 것은 헝가리인들이 조국이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기보다 자신들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헝가리는 EU와 나토(NATO)의 강력한 동맹이 될 것"이라며 대대적인 정치 변혁을 예고했다.

머저르는 또 "헝가리 국민은 EU 가입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된 지 정확히 23년 만에 다시 한번 역사를 써냈다"며 "헝가리는 천 년 동안 유럽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오르반 체제에 대한 충성을 우선시했던 대통령과 대법관, 검찰총장에 대한 사퇴를 촉구하며 "나라를 배신한 자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직격했다.

헝가리가 다시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총리 임기를 2번으로 제한하겠다고도 했다. 이 경우 오르반 총리는 앞으로 다시 총리직에 오를 수 없게 된다.

이번 선거 결과가 주목받은 이유 중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인 개입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오르반 총리를 공개 지지하는 메시지를 잇달아 올렸고, 밴스 부통령은 투표일을 앞두고 부다페스트를 직접 방문해 오르반과 함께 유세에 나섰다. 밴스 부통령은 이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피데스의 승리 시 미국의 경제력을 헝가리에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헝가리 국민은 외부 세력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비친 이 같은 행보에 반감을 드러냈고, 오르반 정권에 누적된 불만과 맞물려 대규모 투표 참여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오르반 총리의 몰락에는 잇단 악재도 작용했다. 선거를 앞두고 헝가리 외무장관이 러시아와 EU 회의 내용을 논의하는 녹취록이 공개됐다. 오르반 총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헝가리 그림책에 쥐가 사자를 도와주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 돕겠다"고 말했다는 녹취록 내용도 폭로됐다. 여기에 부패 스캔들과 경제난 심화까지 겹치며 오르반 총리의 지지율은 급격히 무너졌다.

이번 총선은 오르반 총리가 미국·러시아에 밀착하며 대러시아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 등 EU 정책에 발목을 잡아온 탓에 미국·러시아 대 EU 간 대리전으로도 주목받았다. 오르반의 퇴장으로 헝가리가 그간 막아온 우크라이나에 대한 900억 유로(약 105조원) 규모의 차관 지원이 재개될 가능성이 열렸고, EU가 헝가리의 민주주의 훼손을 이유로 동결해온 EU 기금도 풀릴 것으로 전망된다.

야당의 승리 소식에 국제사회의 축하 메시지가 쏟아졌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헝가리는 유럽을 선택했다. 한 나라가 유럽으로의 길을 되찾았다"고 환영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헝가리 국민이 EU의 가치와 유럽에서의 헝가리의 역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라고 평가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유럽의 민주주의에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밝혔고,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머저르 대표에게 "강하고 안전하며 무엇보다 단결된 유럽을 위해 힘을 합치자"고 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양국의 이익은 물론 유럽의 평화와 안보, 안정을 위해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home 채석원 기자 jdtimes@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