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가 중동 분쟁의 극적인 국면 전환으로 하루 만에 15% 이상 폭락하며 배럴당 90달러 선까지 주저앉았으나 국내 주유소의 휘발유와 경유 가격은 여전히 리터당 2000원을 웃도는 고공 행진을 이어가며 시장 흐름과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9일 기준 전국 휘발유 평균 가격은 전일보다 2.08원 오른 1979.85원을 기록했으며 서울 지역은 이미 2015원을 돌파해 소비자들의 유류비 부담이 임계치에 도달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석유공사 유가 정보서비스 오피넷에 따르면 이날 전국 주유소의 휘발유 평균 판매 가격은 리터당 1979.85원으로 집계됐다. 전날과 비교해 2.08원 상승한 수치다. 경유 가격 역시 전일 대비 2.00원 오른 1971.58원을 기록하며 휘발유와의 가격 차이를 8원 이내로 좁혔다. 특히 서울 지역의 휘발유 평균 가격은 2015.72원까지 치솟으며 2.33원의 상승폭을 기록했다. 전국 최고가는 리터당 2498원에 달해 일부 지역에서는 심리적 저지선이 이미 무너진 상태다.
국내 가격의 완만한 상승세와 달리 국제 석유 시장은 이른바 공포의 매도세가 몰아치며 급격한 가격 조정을 겪었다. 8일 (현지 시각) 기준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전 거래일 대비 18.54달러 하락한 배럴당 94.41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하루 수익률이 마이너스 16.41%에 달하는 기록적인 폭락이다. 북해산 브렌트유 역시 13.29% 급락한 94.75달러를 기록했고 국내 수입 원유의 기준이 되는 두바이유도 14.90달러 하락하며 104.15달러까지 내려앉았다.
이러한 국제유가의 기습적인 폭락은 최근 몇 주간 시장을 압도했던 지정학적 위기감이 한순간에 해소된 결과로 풀이된다. 미국과 이란 사이의 극적인 휴전 합의 소식이 전해지며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의 재개방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의 유가 폭락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름값이 오름세를 멈추지 않는 배경에는 국제 유동성과 국내 소매 가격 사이의 시차 효과가 자리 잡고 있다. 통상 국제 원유 가격의 변동이 국내 주유소 가격에 반영되기까지는 2주에서 3주가량의 기간이 소요된다. 정유사가 원유를 수입해 정제 과정을 거쳐 각 주유소로 배분하는 물리적 시간과 직전 고가에 매입한 재고 물량의 소진 속도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국제 가격이 내리더라도 당분간은 고유가 시기에 수입된 원유 분량이 가격을 지탱하게 된다.
유통 구조의 경직성 또한 가격 하락을 더디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국제유가가 오를 때는 정유사와 주유소가 선제적으로 가격을 올리는 경향이 강한 반면 내릴 때는 마진 확보를 위해 하락분을 천천히 반영하는 비대칭적 가격 결정 구조가 반복된다는 지적이다. 현재 국내 휘발유 가격은 3년 8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 중이며 서울 일부 주유소는 여전히 2500원에 육박하는 가격을 고수하고 있어 국제유가 하락의 온기가 소비자에게 전달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향후 전망은 국제유가의 하락세 지속 여부에 달려 있다. 호르무즈 해협 통행이 완전히 정상화되고 산유국들의 공급 확대가 가시화될 경우 국제 가격은 배럴당 80달러선까지 추가 하락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다만 원-달러 환율 변동성과 정유사의 정제 마진 수준에 따라 국내 하락 폭은 제한적일 수 있다. 소비자들은 국제유가 폭락의 영향이 국내 시장에 본격적으로 반영될 4월 말이나 5월 초가 되어서야 비로소 리터당 1800원대 중반으로의 가격 조정을 체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시장 전문가들은 정부의 유류세 인하 폭 조정이나 환율 방어 대책이 수반되지 않을 경우 국제유가 하락의 혜택이 물가 안정으로 직결되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에너지 공급망의 불안정성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시적 휴전에 따른 낙관론만으로 시장을 판단하기에는 아직 변수가 많다는 분석이다. 소비자로서는 당분간 오피넷 등을 통해 지역별 최저가 주유소를 확인하고 주유 시점을 조절하는 전략적 소비가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