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위키트리 최학봉 선임기자] “분명히 빌려줬는데.” “분명히 들었는데.” “분명히 맞았는데.”
법정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들이 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 필자가 12년간 법정에서 목격한 장면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나쁜 사람이 이기는 순간이 아니다. 억울한 사람이 지는 순간이다. 그 패인은 대부분 두 가지로 귀결된다. 기록이 없었거나, 기록이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쓸 줄 몰랐거나.
법원은 진실을 찾는 곳이 아니다. 입증된 사실을 판단하는 곳이다. 법은 당신 편도, 상대방 편도 아니다. 법은 기록의 편이다. 그리고 기록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의 편이다.
기억은 흐려지고, 기록은 남는다
민사소송법은 변론주의 원칙을 택하고 있다. 법원은 당사자가 주장하고 증명한 사실만을 기초로 판단한다. 아무리 억울한 사연이 있어도, 아무리 상대방이 나쁜 사람이어도, 입증하지 못하면 법적 권리로 전환되지 않는다. “말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 법정의 현실이고, “주장하되 증명하지 못하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친구에게 500만 원을 빌려줬다. 구두 약속이었다. 친구는 “받은 적 없다”고 한다. 계좌 이체 내역 하나가 없다면 어려워진다. 반대로 이체 내역이 있다면, 이번에는 친구가 “그건 선물이었다”고 주장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입증의 부담이 완전히 역전된다. 카카오톡 한 줄, 계좌 이체 내역 하나가 소송의 방향을 바꾼다.
억울함은 감정이고, 기록은 무기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가 있었다. 6개월간 매일 상사의 폭언을 들었다. 목격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그때 기록해 둔 것이 없었다. 날짜도, 발언 내용도, 당시 주고받은 메시지도. 결국 법정에서 “기억 대 기억” 싸움이 됐다. 목격자의 진술도 시간이 지나 엇갈렸다.
반면 비슷한 상황에서 날짜·시간·발언 내용을 그날그날 메모해 온 피해자는 달랐다. 법정에서 그 일지는 강력한 증거가 됐다. 억울함의 크기는 두 사람이 같았다. 결과가 달랐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기록.
의료분쟁 — 기록 싸움의 본질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영역
기록 싸움의 본질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이 의료분쟁이다. 수술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사가 사전에 무슨 설명을 했는지, 간호사가 어느 시점에 어떤 처치를 했는지 — 그 모든 것이 기록으로만 존재한다. 환자도 의료진도 그 순간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한다. 법원과 의료분쟁조정중재원도 결국 기록을 보고 판단한다.
환자 측은 의료법에 따라 의무기록·간호기록·영상자료를 열람하고 사본을 교부받을 권리가 있다. 이 권리는 소송 중에도 행사할 수 있고, 법원을 통한 문서 제출 명령으로도 확보할 수 있다. 병원 기록은 청구하면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사고 직후 담당의가 유족에게 건넨 말, 그 자리에 있던 목격자의 진술, 당시의 현장 정황 — 이것들은 청구한다고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고, 엇갈리고, 사라진다. 먼저 챙겨야 할 것이 바로 이것들이다.
병원 측에도 함정이 있다. 사고 직후 ‘빠진 내용을 보완’하려는 선의로 전자의무기록(EMR)을 수정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EMR 시스템은 모든 접속 이력과 수정 이력을 로그로 남긴다. 소송 감정 과정에서 최초 기록과 수정 기록의 불일치가 드러나는 순간, 아무리 의술이 뛰어났어도 그 병원의 신뢰도는 치명적으로 훼손된다. 선의가 증거인멸로 읽히는 것이다.
법원은 설명의무 위반을 독립적 불법행위로 인정한다. 수술 결과가 의학적으로 최선이었어도 사전 설명이 부족했다면 손해배상 책임이 발생한다.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받았다고 설명의무가 이행된 것이 아니다. 설명의 구체성과 충분성이 별도로 다퉈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짚어야 한다. 기록이 있다고 해서 소송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록이 증거능력이 있는지, 어떻게 제출해야 효과적인지, 상대방의 기록을 어떻게 탄핵할지 — 이것은 기록을 가진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의료분쟁에서 EMR 수정 이력을 확보했다고 해도, 그것을 감정 절차에서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또 다른 전략의 영역이다. 기록을 가진 사람과 기록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만날 때 비로소 싸움이 된다.
의료소송에서 억울한 쪽이 이기는 것이 아니다. 의술이 뛰어난 쪽이 이기는 것도 아니다. 기록이 있고, 그 기록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쪽이 이긴다.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들
소송이 시작된 뒤 기록을 챙기려 하면 늦다. 분쟁의 징후가 보이는 순간부터, 아니 평소부터 기록하는 습관이 법적 권리를 지키는 가장 저렴하고 강력한 방법이다. 중요한 약속은 문자로 남기고, 돈 거래는 계좌로 하고, 합의는 서면으로 작성하고, 억울한 일이 생기면 날짜와 내용을 그날 바로 메모해 두는 것. 병원이라면 동의서 한 장에 안주하지 말고 설명의 내용과 방식까지 기록으로 남겨 두는 것. 이것이 출발점이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법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결과는 다르다. 그 첫 번째 원칙은 하나다. 법은 기록의 편이다. 그리고 기록을 무기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의 편이다.
청유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권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