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한글 현판 놓고 논쟁 격화…"국가 정체성 강화" vs "역사 왜곡"

2026-04-01 09:39

전통 보존과 현대 가치, 광화문을 둘러싼 찬반 의견 충돌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추가로 다는 방안을 놓고 찬성과 반대 의견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지난 31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화문 현판 토론회'에서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가 발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31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화문 현판 토론회'에서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가 발제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글 단체들은 국가의 얼굴에 우리 글자를 다는 것이 정체성을 강화하는 길이라 주장하는 반면, 문화재 전문가들은 경복궁의 역사적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날 선 공방을 벌였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31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층 회의실에서 ‘광화문 현판 토론회’를 개최하고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번 토론회는 지난 1월 20일 국무회의에서 최휘영 문체부 장관이 기존의 한자 현판은 유지하면서 그 아래에 한글 현판을 따로 설치하는 방안을 제안하며 시작된 논의의 첫 단추다. 정부가 검토 중인 안은 2023년 누각 처마에 걸린 한자 현판을 그대로 두되, 그 하단에 별도의 한글 현판을 병기하는 방식이다.


◇ "국가 상징 공간에 우리 글 부재는 모순"… 한글 단체의 강력한 호소

토론회에서 찬성 측 발제를 맡은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한글 현판 설치가 단순한 유물 복원을 넘어선 국가 정체성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문화유산의 범주에서 원형 보존이 기본 원칙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광화문에 한글을 다는 행위는 그보다 더 넓은 차원의 국가적 상징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글이 대한민국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상징하는 광화문에 한글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은 상식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복원이라는 작업이 반드시 어느 한 시점의 모습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앞마당에 세워진 현대적인 유리 피라미드 사례를 언급하며, 전통과 현대적 가치가 어우러질 때 오히려 새로운 문화적 가치가 생겨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글학회를 이끄는 김주원 회장 역시 현재의 한자 현판을 두고 과거의 문화를 비판 없이 이어받고 있는 박제된 유산이라며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그는 지금의 모습이 21세기의 시대정신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며 과감한 혁신이 필요한 시점임을 분명히 했다. 김형우 한반도문화관광연구원장은 관광 정책의 측면에서 접근했다.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추가로 다는 것은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한글에 대한 자부심과 한국의 역동적인 매력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전략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 "역사 왜곡이자 문화유산 훼손"… 전문가들의 냉정한 우려

지난 31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화문 현판 토론회'에서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가 발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31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화문 현판 토론회'에서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가 발제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반면 반대 측에서는 문화유산의 원형성과 역사적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문화유산이 과거의 물질적 증거로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는 현대의 가치관에 맞춰 유산의 모습을 마음대로 바꾸는 행위가 결국 역사 왜곡으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최 소장은 경복궁과 광화문이 일제강점기와 군사정권 시절을 거치며 정치적 목적에 따라 그 상징이 변형되어 왔던 아픈 역사를 언급했다. 만약 지금 시대의 요구에 따라 현판을 또다시 바꾼다면, 이는 광화문이 가진 진정한 문화유산으로서의 의미를 깎아먹는 일이 될 것이라 우려했다. 해외에서도 과거의 언어와 표현 방식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사례가 훨씬 많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건축 분야 전문가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보탰다. 홍석수 서일대 건축과 교수는 경복궁을 비롯해 창경궁과 덕수궁 등 우리 궁궐들이 일제강점기에 의도적으로 파괴되었다가 이제야 중장기 계획에 따라 제 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라는 점을 짚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화문의 원형 복원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린다면, 앞으로 진행될 다른 복원 사업들의 정당성마저 잃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이강민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는 한자 현판 아래에 한글을 덧붙이는 방식이 자칫 동어반복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실물 현판을 추가하는 대신 증강현실 기술이나 건물 외벽에 영상을 쏘는 미디어 파사드 기법 등을 활용해 현대적 가치를 표현하는 대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 굴곡진 광화문 현판의 역사… 논의는 이제 시작

광화문 현판은 그동안 수차례 부침을 겪어왔다. 1968년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쓴 한글 현판이 걸렸으나, 이후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에 한자 현판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이 현판에 금이 가는 문제가 발생했고, 2023년 10월에 지금의 현판이 새롭게 걸렸다. 현재의 한자 현판은 2016년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찾아낸 19세기 광화문 사진을 바탕으로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를 새겨 정교하게 복원한 결과물이다.

당장 결론을 내기보다 우리 사회의 지혜를 모으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김권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광화문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가꾸어갈지는 미래를 살아갈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야 할 큰 숙제라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번 토론회에서 나온 다양한 의견들을 바탕으로 논의를 계속 이어갈 방침이다. 4월 초에는 문체부 공식 누리집에 국민들이 직접 의견을 남길 수 있는 게시판을 열고,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심층 조사와 대규모 설문조사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정부는 이러한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쳐 광화문 한글 현판 설치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결정할 계획이다.

home 김지현 기자 jiihyun1217@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