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너머로 이웃집 마당의 감나무가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낮지만, 그 벽 사이에는 600년을 이어온 가문의 긍지가 촘촘하게 쌓여 있다.

경상북도 성주에 자리한 한개마을은 오늘날에도 주민들의 삶이 이어지는 전통마을이다. 누군가의 조상이 600년 전 열었던 그 대문을 오늘날의 후손이 여전히 같은 소리를 내며 열고 닫는, 현재의 시간이 흐르는 공간이다.
이 마을의 이름인 ‘한개’는 언뜻 들으면 하나라는 뜻 같지만, 사실은 ‘큰 나루’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과거 마을 앞에 큰 백천이 흐르고 나루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세종 시절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이곳에 뿌리를 내린 뒤 성산 이씨들이 모여 살며 지금의 동성촌을 이루었다. 지형적으로는 영취산 줄기가 마을을 감싸안은 형세로, 풍수지리상 영남에서 손꼽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배산임수의 형세를 갖춘 이 마을은 산의 기운과 물의 흐름이 어우러진 터전으로 평가된다.

마을을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담장이다. 전체 길이가 3.3km에 이르는 이 담장은 진흙과 돌을 섞어 쌓은 토석담으로, 마을의 가옥들과 어우러져 독특한 선의 미감을 이룬다. 흥미로운 점은 담장의 높이다. 주택 뒤편이나 산과 맞닿은 곳은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담을 높게 쌓았지만, 앞마당을 가로지르는 내곽담은 사람의 눈높이보다 낮거나 처마 끝에 닿지 않게 설계했다. 이는 집 안팎의 소통을 막지 않으려는 조상들의 배려이자, 자연 풍경을 집 안에서도 바라볼 수 있게 하려는 지혜를 보여준다.
한개마을은 학문과 충절의 고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말기 성리학의 거두였던 이진상과 응와 이원조 등 이름난 학자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라 학문을 닦았다. 또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이승희 선생의 자취도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됐으며, 마을 내 10여 곳의 가옥은 개별적으로도 국가 및 경상북도 지정 민속유산으로 관리될 만큼 뛰어난 가치를 자랑한다.

실제로 이곳을 방문한 이들은 인위적인 꾸밈이 없는 담백한 풍경에 높은 만족을 보인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여행 커뮤니티에는 “높은 빌딩 숲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낮은 흙담 길을 걷는 것만으로 누그러진다”라거나 “고택의 툇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영취산 능선이 좋다”는 반응이 이어진다. 화려한 볼거리에 치중하기보다 고요한 사색을 즐기려는 여행객들에게 이곳은 편안한 쉼터가 된다.

마을 주변에는 함께 둘러보기 좋은 명소들도 있다. 차로 약 5분 거리에는 세종대왕자 태실이 있다. 조선 왕실의 태실 문화가 온전한 형태로 보존된 이곳은 한개마을의 역사적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성주읍내로 발길을 돌리면 수백 년 된 왕버들나무가 숲을 이룬 성밖숲도 만날 수 있다. 왕버들 아래를 걷다 보면 성주의 또 다른 풍경을 느낄 수 있다.
성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지역의 맛을 경험하는 일이다. 전국 참외 생산지로 꼽히는 곳답게 성주 참외는 높은 당도와 아삭한 식감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참외를 활용한 잼이나 말랭이, 참외 스무디 같은 먹거리도 나오고 있다. 전통적인 맛을 찾는다면 ‘등겨장’을 눈여겨볼 만하다. 보릿등겨를 구워 만든 메줏가루를 활용한 성주만의 전통 장으로, 특유의 구수한 풍미가 한개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제철 식재료로 차려낸 소박한 시골 밥상도 여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한개마을은 별도의 입장료가 없으며 누구나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다. 마을 입구에는 무료 공영주차장이 마련돼 있어 주차 부담도 덜 수 있다. 다만 이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며 삶을 이어가는 터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관람할 때는 주민들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도록 정해진 길을 따라 걷고, 가옥 내부를 들여다보거나 촬영할 때는 거주민의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다.
마을을 빠져나오는 길에는 등 뒤로 길게 드리워진 고택의 그림자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빠른 속도만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한개마을은 조금 느리게 걷는 법과 낮게 바라보는 법을 떠올리게 한다. 흙과 돌이 빚어낸 담장을 따라 걷는 시간은 한 템포 쉬어 가게 한다. 고요한 분위기가 그리운 날이라면 성주의 낮은 담장 길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