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정의 선택이 남긴 온기는 10여 년이 지나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씨앗이 되고 있었다.
다음 달 대학 입학을 앞둔 박원근 씨는 아버지가 장기를 기증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12년 만인 2024년에 처음 알게 됐다. 다섯 살이던 2012년, 아버지 고 박영진 씨는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그 순간 다섯 명에게 새 삶을 선물했다.
어린 아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상처받을까 우려해 장기기증 사실을 오랫동안 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박 씨가 고등학생이 됐고, 뇌사 장기기증자 자녀에게 수여하는 장학금 대상자로 선정되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마지막 선택을 알게 됐다.

박 씨에게 아버지는 엄하면서도 따뜻한 사람이었다. 특히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어머니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직접 가르쳤다고 한다. 가족을 위해 묵묵히 애쓴 가장의 모습은 어린 아들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는 생전 사람을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를 돕는 길을 택하신 것 같다며, 그 숭고한 선택이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박 씨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재단법인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가 운영하는 D.F장학회 장학금을 받게 됐다. D.F는 도너패밀리의 약자로, 뇌사 장기기증자 자녀를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두 차례에 걸쳐 받은 장학금 총 300만 원을 그는 아버지가 남긴 또 다른 유산이라 여기고 있다. 당장 쓰기보다 저축해 두었다가 꼭 필요한 순간에 의미 있게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장학금만이 아니었다. 생명을 나누려는 마음도 함께 이어졌다. 박 씨는 아버지를 본받아 자신도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하려 한다고 밝혔다. 한 사람의 선택이 가족에게는 자부심이 되고, 또 다른 생명에게는 기적이 되는 순간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재단법인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는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생명보험교육문화센터에서 제7회 D.F장학회 장학금 수여식을 열고 박 씨를 포함한 뇌사 장기기증자 자녀 21명에게 총 3500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각자의 사연을 지닌 유가족과 장학생들이 모여 고인의 뜻을 되새겼다.

장학생 대표로 나선 정지산 씨는 2010년 장기기증을 하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떠올리며 장학금은 아버지가 남긴 사랑의 씨앗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실천한 따뜻함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 간호학과에 편입해 간호사를 꿈꾸고 있다고 밝혔다. 누군가의 생명을 살린 선택이 또 다른 돌봄의 꿈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본부는 2020년부터 매해 뇌사 장기기증자의 자녀에게 장학금을 수여하며 학업을 지원해 왔다. 관계자는 최근 5년간 뇌사 장기기증자 중 절반 가까이가 40대와 50대라며, 학업을 이어가야 할 자녀가 남겨진 경우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2020년 8명으로 시작한 장학생은 올해 대학생 15명, 고등학생 4명, 중학생 2명 등 총 21명으로 늘어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지금까지 총 93명의 유자녀에게 누적 1억4926만 원의 장학금이 전달됐다.
장기기증은 한 개인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는다. 남겨진 가족에게는 깊은 상실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생명을 살렸다는 자부심이 남는다. 그리고 그 자부심은 다시 사회를 향한 나눔으로 확장된다. 박원근 씨가 아버지를 기억하며 새로운 출발선에 선 것처럼, 기증자의 선택은 시간을 건너 또 다른 희망을 키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