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가 다시 쓴 역사~ 한불 수교의 시작점은 ‘1886년’이 아닌 ‘나주’였다

2026-02-20 13:13

고교 심화 프랑스어 교과서에 ‘나르발호 사건’ 전격 수록
1851년 나주 앞바다서 빚어진 기적… 프랑스 선원 구한 조선의 인류애
샴페인과 막걸리의 첫 만남… 170년 전 비금도서 열린 ‘오찬 외교’ 재조명

[위키트리 광주전남취재본부 노해섭 기자]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한국과 프랑스의 첫 공식 수교 연도는 1886년(조불수호통상조약)이다. 하지만 이보다 무려 35년 앞서, 조선의 땅 나주에서 양국 간의 뜨거운 ‘첫 만남’이 있었다는 사실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며 역사의 한 페이지가 새로 쓰이게 됐다.

나주시가 ‘나르발호 사건’을 고교 심화 프랑스어 교과서 수록에 기여한 김미연 검토위원(왼쪽), 최내경 집필총괄자(왼쪽 두 번째), 양수경 시정 자문위원(오른쪽)에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나주시가 ‘나르발호 사건’을 고교 심화 프랑스어 교과서 수록에 기여한 김미연 검토위원(왼쪽), 최내경 집필총괄자(왼쪽 두 번째), 양수경 시정 자문위원(오른쪽)에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전남 나주시는 1851년 나주목 관할 해역에서 발생한 ‘나르발호 사건’이 고등학교 심화 프랑스어 교과서 문화 편에 공식 수록됐다고 20일 밝혔다. 이는 단순한 해난 사고를 넘어, 양국이 나눈 인도주의적 교류와 최초의 외교적 접촉을 증명하는 결정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851년 4월, 나주 앞바다에 나타난 이방인들

사건의 발단은 1851년 4월 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포경선 ‘나르발(Narval)호’가 지금의 신안군 비금도(당시 나주목 관할) 인근에서 좌초되면서 프랑스 선원 29명이 낯선 조선 땅에 발을 디뎠다. 말이 통하지 않는 두 나라 사람들의 첫 조우였지만, 긴장감 대신 싹튼 것은 ‘인류애’였다.

당시 나주 목사를 겸임하던 남평현감 이정현은 조난당한 이방인들을 내치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중국 상하이에서 급파된 프랑스 영사 샤를 드 몽티니(Charles de Montigny)가 비금도에 도착하자, 조선 관료들은 그들을 정중히 맞이하며 국경을 초월한 환대를 베풀었다.

윤병태 시장이 지난 6월 프랑스 국제교류 방문 당시 1851년 한불 첫 만남의 상징인 ‘옹기주병’이 보관된 프랑스 파리의 세브르 국립도자기박물관을 방문했다.
윤병태 시장이 지난 6월 프랑스 국제교류 방문 당시 1851년 한불 첫 만남의 상징인 ‘옹기주병’이 보관된 프랑스 파리의 세브르 국립도자기박물관을 방문했다.

◆샴페인과 옹기 술병… 문화로 건배하다

교과서가 주목한 대목은 바로 이 ‘환대’의 장면이다. 구조 과정에서 열린 만찬 자리에는 조선의 전통주와 프랑스의 샴페인이 함께 올랐다. 서로 다른 술잔을 부딪치며 나눈 우호의 시간은 단순한 구조 활동을 넘어선 ‘문화 외교’의 시초로 기록된다.

당시 몽티니 영사가 선물로 받은 투박한 조선 옹기 술병은 170년이 지난 지금도 프랑스 세브르 국립도자기박물관에 소중히 보관돼 있어, 그날의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나르발호 사건이 심화 프랑스어 교과서에 수록됐다. 사진은 교과서에 실린 모습
나르발호 사건이 심화 프랑스어 교과서에 수록됐다. 사진은 교과서에 실린 모습

◆나주, 잊힌 역사를 복원해 미래로 잇다

이번 교과서 수록은 나주시의 집요한 역사 찾기 노력의 결실이다. 시는 피에르 엠마누엘 후 파리시테대학교 교수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 사건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발굴해왔다. 학술포럼 개최는 물론, 역사 만화 제작과 전시 체험관 조성 등 다양한 콘텐츠로 대중에게 다가갔다.

나주시는 지난 19일 이번 교과서 수록에 결정적 역할을 한 최내경 서경대 교수 등 집필진에게 감사장을 수여하며 그 공로를 치하했다.

윤병태 나주시장은 “나르발호 사건은 조선이 폐쇄적인 나라였다는 편견을 깨고, 위기에 처한 타국민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던 자랑스러운 역사”라며 “교과서 수록을 계기로 미래 세대인 학생들이 나주가 한불 외교의 시발점이었음을 기억하고, 양국 교류의 새로운 가교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170년 전, 나주 바다에서 피어난 우정의 이야기가 이제 교실 안에서 학생들의 가슴을 뛰게 할 살아있는 역사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home 노해섭 기자 nogar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