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한국인의 밥상에는 어김없이 ‘바다의 우유’라 불리는 굴이 등장한다.

김장 김치 사이에 속살을 드러낸 생굴부터 뜨끈한 굴국밥, 노릇하게 부쳐낸 굴전까지. 우리에게 굴은 제철이면 시장이나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식재료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는 순간, 굴의 위상은 180도 달라진다. 한국에서는 젓가락으로 대여섯 알을 한꺼번에 집어 먹는 ‘서민의 보양식’이 서구권에서는 샴페인을 곁들여 한 알씩 아껴 먹는 ‘최고급 미식’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생산량이 결정한 ‘식탁 위 계급도’
굴의 운명을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단연 생산량이다. 한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2위의 굴 생산국이다. 특히 리아스식 해안의 축복을 받은 남해안, 그중에서도 통영과 거제, 고성 일대는 굴 양식의 최적지로 꼽힌다. 이곳에서만 연간 약 30만 톤 규모의 굴이 쏟아져 나온다.
공급량의 차이는 곧 가격의 격차로 이어진다. 미국이나 유럽의 주요 도시 오이스터 바(Oyster Bar)에서 굴 12개(1다즌) 세트를 주문하려면 수만 원에서 많게는 십수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그 돈이면 수산시장에서 굴 한 망태기(약 10kg 내외)를 통째로 살 수 있다. 외국인들이 한국 수산시장에서 산처럼 쌓인 굴을 보며 경악하는 이유도 바로 이 압도적인 가성비에 있다.
뉴욕에선 ‘와인’처럼, 런던에선 ‘예술’처럼

미국 내륙 지역에서 생굴은 평생 한 번 접하기 어려운 미지의 음식인 경우가 많다. 뉴욕이나 LA 같은 해안 대도시조차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서구권에서 굴은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 하나의 문화적 체험이자 사치재로 소비된다. 뉴욕의 유명 오이스터 바를 가보면 메뉴판이 마치 와인 리스트처럼 상세하다.
유럽으로 넘어가면 이 ‘귀하신 몸’ 대접은 더욱 극적이다. 프랑스 브르타뉴의 베롱(Belon) 굴이나 아일랜드 골웨이(Galway) 굴은 농산물 품질 인증제도인 AOC와 같은 원산지 보호제도의 관리를 받는다. 명품 가방이나 와인처럼 엄격한 품질 관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유럽 전체의 굴 생산량은 한국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기에, 런던의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굴 6알에 40파운드(약 7만 5천 원)를 받는 풍경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가난의 상징에서 부의 상징으로” 뒤집힌 역사
흥미로운 점은 서구에서도 굴이 처음부터 비싼 음식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19세기 영국에서 굴은 가장 값싼 서민 음식이자 단백질원이었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그의 저서에서 “가난과 굴은 항상 함께 간다”고 묘사했을 정도다. 길거리 도처에서 굴을 팔았고, 가난한 이들은 고기 대신 굴로 배를 채웠다.
하지만 산업화와 함께 해양 오염이 심화되면서 자생하던 굴의 생산량이 급감했다. 공급이 끊기자 굴은 순식간에 희소 가치를 지닌 고급 식재료가 되었고, 상류층만이 즐길 수 있는 ‘계급의 음식’으로 격상됐다.

반면 한국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선사시대 패총(조개무덤)의 대부분이 굴 껍데기라는 점은 굴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에게 흔한 식량이었음을 증명한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도 굴의 감미로운 맛과 국, 데침, 젓갈 등 다양한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20세기 들어 수하식 양식법이 확산되면서 한국은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했고, 덕분에 우리는 역사적 친숙함을 넘어 경제적 풍요로움 속에서 굴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R’자가 들어간 달의 비밀
서양에는 “굴은 이름에 R 자가 들어간 달(September~April)에만 먹으라”는 오랜 격언이 있다. 이는 단순히 5~8월(May~August)이 산란기라 맛이 떨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과거 냉장 기술과 유통 체계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여름철 고온에서 굴은 쉽게 부패했고 치명적인 식중독을 유발했다. 이 경험적 공포가 격언으로 굳어진 것이다.

산란기의 굴은 다음 세대를 위해 에너지를 집중하느라 살이 물러지고 독성을 띠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은 고도화된 냉동 기술과 가공법, 그리고 산란기가 없는 ‘삼배체 굴’ 양식 등을 통해 사계절 내내 안전하게 굴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선도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한국처럼 질 좋은 굴을 저렴하고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나라는 극히 드물다. 서구권 미식가들에게 한국의 굴 국밥집이나 굴 보쌈집은 그야말로 ‘성지’와 다름없다. 우리가 무심코 젓가락으로 듬뿍 집어 먹는 그 한입은, 사실 누군가에게는 큰맘 먹고 지불해야 하는 수십 달러짜리 호사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