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대작들이 박스오피스를 장악해온 흐름이 하루 만에 뒤집혔다. 누적 571만 명을 넘긴 ‘아바타: 불과 재’가 내려오고, 한국 멜로 영화가 정상에 섰다. 개봉 초반부터 거대한 마케팅 파상공세로 승부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람 이후의 평가와 추천이 관객을 움직인 ‘입소문형 역주행’의 전형에 가깝다.

8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 영화 ‘만약에 우리’는 7일 하루 5만 4941명을 동원해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누적 관객 수는 64만 7896명. 같은 날 ‘아바타: 불과 재’는 4만 6691명으로 2위였고 누적 관객 수는 571만 5886명이다. ‘주토피아2’는 2만 2565명으로 3위, 누적 815만 7887명을 기록했다. 대작 사이에서 한국 멜로가 1위를 가져갔다는 사실 자체가 ‘이변’으로 읽히는 이유다.
‘만약에 우리’는 지난해 12월 31일 개봉했다. 뜨겁게 사랑했던 은호(구교환)와 정원(문가영)이 10년 만에 우연히 재회하면서, 기억의 흔적을 펼쳐보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개봉 직후 큰 파열음 없이 조용히 관객을 늘려왔고, 한동안 2위를 지키다 일주일 만에 마침내 1위를 찍었다. 파급력이 폭발한 계기는 결국 ‘보면 납득되는’ 감정선이다. 과장된 설정 대신 현실의 체온을 끌어안은 멜로가 관객의 재관람과 추천을 만들었다.

흥행 신호는 개봉 전부터 있었다. 이 작품은 역대 한국 로맨스·멜로 영화 중 최고 사전 예매량을 기록하며 주목받았다. 개봉일인 지난해 12월 31일 오전 7시 기준 사전 예매량 11만 8389장. 로맨스·멜로 장르 동시기 최고 사전 예매량을 기록했던 ‘헤어질 결심’(2022)의 11만6000장 대를 넘어섰다. 입소문 흥행으로 길게 달린 ‘건축학개론’의 개봉 당일 오전 예매량 1만8417장, ‘너의 결혼식’ 3만1371장과 비교하면 수배 이상 높은 출발선이다. 예매에서 한번, 개봉 후 반응에서 다시 한번 ‘기대치’를 증명한 셈이다.
실관람 지표도 뒷심을 뒷받침한다. CGV 골든 에그지수 98%를 꾸준히 유지하며 상영작 최상위권을 지키고 있고, 네이버 실관람객 평점은 8일 기준 9.19점이다. 같은 멜로 장르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92%)를 상회하는 에그지수 역시 ‘추천 확률’이 높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박스오피스 1위는 결과지만, 이 작품의 동력은 만족도 지표에서 더 선명하다.

호평의 배경에는 ‘리메이크의 정답’에 가까운 현지화가 있다. 원작은 2020년 중국 멜로 영화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한 ‘먼 훗날 우리’. ‘만약에 우리’는 원작의 감수성을 빌리되, 국내 관객이 바로 알아보는 현실 문제를 서사의 전면에 놓았다. 돈도 집도 없는 지방 청년들의 고단한 ‘서울 살이’, 취업난, 치솟는 집값 같은 삶의 압박이 연애의 감정과 결합하면서, 사랑 이야기가 곧 생존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최근 중화권·일본 멜로 리메이크 다수가 ‘원작의 분위기’를 모사하는 데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면, 이 작품은 정서를 ‘번역’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도영 감독은 두 주인공을 ‘성장형 캐릭터’로 설계한 점을 차별점으로 꼽았다. “원작 팬으로서 여운과 애절함이 강하게 남았던 이유를 고민했다”며 “서로 잘 이별하고 각자의 삶 속에서 성장했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확장했다”고 설명했다. 이 선택이 관객의 체감과 맞닿는다. 과거의 후회가 현재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지나 성장하는 서사로 마무리되면서 ‘멜로의 여운’이 단순한 슬픔을 넘어 잔상으로 남는다.

배우들의 연기도 입소문을 키운 핵심이다. 구교환은 삼수를 거쳐 컴퓨터 공학과에 재학 중인 ‘이은호’로, 설렘과 이별의 후회, 재회의 반가움과 슬픔을 촘촘히 쌓아 올렸다. 10년의 시간을 오가며 미숙했던 청춘과 성숙해진 현재의 감정 결을 한 인물 안에서 설득력 있게 이어 붙인다.
문가영은 정원을 통해 고달픈 서울살이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청춘에서 성숙한 커리어우먼으로 성장하는 궤적을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현실적이고 복잡다단한 감정선을 유쾌함과 애틋함 사이에서 흔들림 없이 유지하는 ‘케미’가 영화의 밀도를 높인다.

관객 반응은 작품의 현재를 압축한다. “잊었다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니가 생각났어. 잘 지내니?”, “원작도 인생작이었는데 한국 정서로 풀리니 여운이 더 깊게 남네요”, “처음으로 엔딩크레딧까지 보고 나왔다”, “구교환 멜로 또 언제 오는지”, “문가영 때문에 펑펑 울고 나옴” 등 반응이 이어진다.
이 영화는 지금, ‘대작을 이겼다’는 승부의 언어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현실 공감’이라는 무기로 관객을 다시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방식, 그리고 그 결과가 1위라는 숫자로 확인된 순간이다.

‘만약에 우리’는 전국 극장에서 절찬리 상영 중이다. 러닝타임 115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