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한 노후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숨진 70대 남성이 베트남전 참전 국가유공자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한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기엔, 이 사고가 던지는 질문은 너무 무겁다.
지난 28일 오후 6시 56분쯤 울산 남구 달동의 10층짜리 아파트 7층 세대에서 불이 났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 당국은 화재 현장에 진입했지만, 진화는 쉽지 않았다. 집 안은 쓰레기와 폐가전, 옷가지 등이 성인 남성 키 높이까지 쌓여 있었고, 정상적인 동선조차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다. 소방대원들은 쓰레기 더미를 하나하나 치워가며 진화 작업을 이어갔고, 불은 발생 약 7시간 45분 만에야 완전히 꺼졌다.
이 집에 홀로 살고 있던 70대 남성 A씨는 쓰레기 더미 위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A씨는 이 아파트에서 20년 가까이 혼자 지내온 주민이었고, 월남전에 참전했던 국가유공자로 매달 정부로부터 참전명예수당을 받아왔다. 국가를 위해 싸웠던 노병이 삶의 마지막을 ‘쓰레기 집’에서 맞이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웃 주민들에 따르면 A씨는 수년 전부터 저장강박 증세를 보였다. 외출 후 돌아올 때마다 비닐봉지에 각종 쓰레기를 담아오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목격됐고, 집 안에는 점점 물건이 쌓여갔다. 악취와 해충 문제로 주민들의 민원도 이어졌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과거 경비까지 들여 쓰레기를 전부 치우고 도배와 장판을 새로 해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은 다시 쓰레기로 가득 찼다. 정리를 요청하자 A씨는 “법대로 하라”며 강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구청과 동 행정복지센터 역시 여러 차례 현장을 찾아 정리를 권유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문제는 제도였다. 저장강박이 의심되는 가구라 해도, 당사자가 거부할 경우 지자체가 강제로 개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사실상 없다. 일부 지자체에는 저장강박 가구를 지원·관리하는 조례가 마련돼 있지만, 이번 사고가 발생한 울산 남구에는 관련 제도가 없었다. 개인의 선택과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 뒤에서, 위험은 방치되고 있었던 셈이다.
화재 피해를 키운 또 다른 원인은 아파트의 구조적 한계였다. 불이 난 아파트에는 각 층마다 옥내소화전은 설치돼 있었지만, 화재를 자동으로 감지해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는 없었다. 소방 당국은 해당 아파트가 설치 의무 대상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 아파트는 1996년 사용 승인을 받았는데, 당시 법 기준으로는 16층 미만 공동주택에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가 없었다. 이후 법이 개정되며 의무 대상은 점차 확대됐지만, 이미 지어진 건물에는 소급 적용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특정 아파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방청이 올해 6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준공 후 20년이 지난 전국 노후 아파트 9894곳 중 45.1퍼센트인 4460곳에는 여전히 스프링클러 설비가 없다. 불이 나면 초기 진화가 늦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히 고령자나 거동이 불편한 주민이 많은 곳일수록 위험은 더 커진다.
이번 사고는 저장강박이라는 개인의 문제, 노후 주거 환경이라는 구조적 문제, 그리고 제도의 공백이 한 지점에서 겹칠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도움의 손길을 거부했던 한 사람의 선택만으로 이 사건을 정리하기엔, 사회가 놓친 신호들이 너무 많다.
국가유공자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외로운 노인의 삶, 그리고 여전히 방치된 노후 아파트의 현실은 이번 화재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