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트나 코트를 꺼내 입다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군데군데 올라온 보풀이다. 옷이 낡아 보이고 관리가 안 된 인상을 주지만, 막상 보풀 제거기를 꺼내기엔 번거롭고 배터리가 없을 때도 많다. 그런데 의외의 도구 하나로 이 보풀을 꽤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바로 집에 하나쯤은 꼭 있는 고무장갑이다.
고무장갑으로 보풀을 문지르면 생각보다 잘 떨어진다. 이유는 단순하다. 고무장갑 표면의 마찰력 때문이다. 니트나 코트에 생기는 보풀은 섬유 끝이 마찰로 엉겨 붙은 상태다. 고무장갑은 표면이 매끈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세한 요철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요철이 섬유 사이로 파고들어 엉킨 보풀을 잡아당긴다.
여기에 정전기도 한몫한다. 고무는 마찰이 일어나면 정전기가 쉽게 발생하는 재질이다. 옷감을 고무장갑으로 쓸어내릴 때, 섬유에 붙어 있던 가벼운 보풀들이 정전기에 끌려 떨어져 나온다. 먼지가 고무장갑에 달라붙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래서 보풀이 흩어지지 않고 한쪽으로 모인다.

특히 니트류에서 효과가 좋은 이유도 있다. 니트는 실 자체가 꼬여 있어 보풀이 표면 위에 떠 있는 경우가 많다. 고무장갑으로 살살 쓸어주면 실을 자르지 않고도 보풀만 분리해 낼 수 있다. 보풀 제거기처럼 날이 닿지 않기 때문에 옷감 손상 위험도 적다.
코트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 울 코트나 캐시미어 코트는 보풀이 생기면 섣불리 제거기를 쓰기 망설여진다. 이럴 때 고무장갑으로 결 방향대로 부드럽게 문지르면 표면에 붙은 잔보풀과 먼지를 함께 정리할 수 있다. 특히 소매 안쪽이나 겨드랑이처럼 마찰이 잦은 부위에 효과가 좋다.
사용할 때는 몇 가지 요령이 있다. 먼저 옷은 평평한 곳에 놓는다. 입은 상태에서 문지르면 옷감이 늘어날 수 있다. 고무장갑은 마른 상태가 기본이다. 물기가 있으면 마찰력이 떨어지고 옷이 젖을 수 있다. 손바닥 전체로 한 방향만 쓸어내리는 것이 핵심이다. 앞뒤로 문지르면 보풀이 더 엉킬 수 있다.

힘을 주는 것도 금물이다. 보풀은 떨어뜨리는 것이지 긁어내는 게 아니다. 가볍게 여러 번 반복하는 게 좋다. 보풀이 고무장갑에 뭉쳐 붙으면 중간중간 털어내며 계속 진행한다. 짧은 시간 안에 눈에 띄는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모든 옷에 만능은 아니다. 실크나 아주 얇은 니트처럼 섬세한 소재에는 피하는 게 좋다. 대신 면 니트, 울 혼방, 폴리에스터 코트처럼 일상복에는 충분히 활용 가능하다. 값비싼 옷을 바로 세탁소에 맡기기 전, 응급 처치용으로도 적당하다.
이 방법의 또 다른 장점은 비용과 접근성이다. 보풀 제거기는 가격도 들고 관리도 필요하지만, 고무장갑은 이미 주방이나 욕실에 있다. 여행지나 출장지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갑자기 중요한 약속이 생겼을 때도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생활 기술이다.

보풀은 옷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주범이다. 제거기를 자주 쓰면 실이 점점 얇아지고, 결국 구멍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무장갑을 활용한 보풀 정리는 옷을 오래 입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작은 도구 하나가 옷의 인상을 바꾸고, 관리하는 사람의 손길까지 느껴지게 만든다.
평범한 고무장갑이 옷 관리 도구로 쓰일 거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생활 속에는 이렇게 용도를 바꿔 쓰면 훨씬 유용해지는 물건들이 많다. 다음번에 니트 보풀이 눈에 들어온다면, 보풀 제거기 대신 고무장갑부터 떠올려보자. 의외로 가장 빠르고 간단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