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가 1980년 사북항쟁을 다룬 영화 '1980사북' 상영회에 참석해 사북항쟁을 기억하고 국가의 사과를 촉구하는 물결에 힘을 보탰다.
1980사북 시민상영위원회는 지난 16일 경남 양산에서 양산시민 초청 상영회를 열었다. 문 전 대통령은 영화 상영 뒤 박봉남 감독과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의 무대인사가 끝나자 직접 무대로 나와 두 사람을 격려했다. 
‘1980사북’은 신군부 계엄 아래에서 벌어진 사북 동원탄좌 광부 항쟁의 진실과 사건 이후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조명한 작품이다.
사북항쟁은 1980년 4월 강원 정선군 사북읍에 위치한 동원탄좌 소속 탄광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어용노조 등에 분노해 일으킨 봉기다. 당시 사북탄광은 대한민국 민영광산 중 최대 규모로 5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했지만, 이들의 노동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광부들은 30~40도가 넘는 고온 속에서 고난도의 노동을 해야 했으며 산업재해도 빈번했다. 탄광 속의 짙은 석탄가루는 광부들의 폐를 진폐증으로 망가뜨렸다.
그럼에도 광부 월급은 월평균 15만5000원에 불과했다. 1980년의 물가가 라면 100원, 버스비 100원, 소주 200원, 자장면 500원이었음을 고려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회사는 광부들이 캔 탄의 등급을 일부러 낮게 매기거나 생산량을 적게 잡는 방식으로 임금을 깎았다. 사택은 벽이 너무 얇아 바람도 제대로 막지 못했고 상수도 시설도 거의 보급되지 않았다. ‘푸세식’인 공동화장실을 30가구당 1개꼴로 사용해야 했으며 대변을 볼 수 있는 칸은 4칸도 채 안 됐다.
회사는 광부들을 철저히 감시했다. '암행독찰'이라는 이름으로 사장 친인척들로 구성된 간부들이 하루종일 탄광과 시내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행동을 관찰했다. 산업재해가 발생해도 보상은 없었고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해고통지를 내렸다. 노조는 이름만 노조였을 뿐 사실상 어용노조로 회사의 꼭두각시 같은 존재였다. 
1978년 노조지부장 선거에서 어용노조 지부장이 부정선거로 재선됐다. 회사는 선거 전 제주도 신제주호텔에서 대의원 29명에게 1000만 원의 거금을 들이며 극진히 대접했다. 광부들은 분노했고 1979년 7월 광부 2568명의 서명을 받아 노조지부장 직선제와 노조 개혁을 요구했다. 1980년 3월 임금교섭에서 어용노조 지부장이 광부들의 40% 임금 인상 요구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20% 인상으로 처리하자 광부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1980년 4월 21일 광부들이 노조사무실 앞에 집회를 열기 위해 모였다. 오후 3시쯤 300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 앞에서 경찰이 채증을 위해 사진을 찍자 광부들이 경찰을 쫓았다. 경찰이 탄 지프차가 광부 한 명을 치고 달아나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그 날 밤 경찰서는 광부들에게 점거됐고 경찰은 철수했다.
4월 22일 강원도경은 경찰병력 347명을 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광부들과 주민들은 사북읍에서 광업소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안경다리로 집결했다. 이곳은 철도 자체가 높은 지대로 돼 있어 토성의 성곽과 같았고 안경다리는 철도 밑으로 뚫린 굴다리여서 성문과 같은 곳이었다. 1500여 명이 경사 45도의 10m 높이 언덕에 모였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자 주민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여자들은 돌을 나르고 남자들은 돌을 던졌다.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을 입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경찰은 결국 철수했다.
경찰은 계엄당국에 공수부대 투입을 요청했다. 1군 계엄사령부는 군 병력 300명을 출동준비시키고 영월, 정선 지역 대대에 출동준비 대기를 지시했다. 계엄사의 요청으로 4월 23일 공군 비행기가 정선 일대를 비행했고 국군기무사령부가 제출한 자료에는 구체적인 군병력 투입계획과 투입 시점까지 결정돼 있었다.
4월 22일부터 24일까지 노사정 협상이 열렸다. 4월 24일 최종적으로 11개 조항의 합의가 이뤄졌다. 노조지부장 사퇴, 부상자 치료비 회사 부담, 상여금 250%에서 400%로 인상, 임금인상 소급분 지급, 실력행사 금지 등이 포함됐다. 항쟁은 평화적으로 종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4월 25일 강원도경은 주모자 색출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광부들을 처벌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뒤집은 것이었다. 계엄사는 '사북 사건 합동수사단'을 조직했다. 수사단은 보안부대, 검찰, 중앙정보부, 경찰로 구성됐다. 5월 6일 합동수사단은 '수습대책위원회'를 한다며 광부대표 이원갑과 광부 10여 명을 불러 모두 연행했다. 이렇게 연행된 사람은 110여 명에 달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수사 동안 모진 고문을 겪으며 폭력행위를 자백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볼펜으로 손가락을 끼워 비틀고, 무릎 뒤에 각목을 끼우고 앉혀 허벅지를 짓밟았으며, 각목으로 발바닥을 때렸다. 양 손목과 발목을 묶고 가운데 각목을 가로질러 책상 사이에 걸어놓고 고춧가루 탄 물을 코와 입에 번갈아 들이부었다. 통닭구이, 물고문, 몽둥이질이 반복됐다. 여성들은 성고문까지 당했다.
1980년 8월 6일 1군 계엄보통군법회의는 이원갑 등 2명에게 징역 5년, 신경 등 3명에게 징역 3년 등을 선고했다. 28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의 형량을 합치면 84년 6개월에 달했다. 사북항쟁 관련자들은 블랙리스트에 적혀 취업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후유증으로 퇴사해야 했다. 가족들도 지속적으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2015년 12월 서울고법 형사6부는 사북항쟁과 관련된 재심에서 이원갑과 신경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들에게 적용된 계엄포고령 위반과 소요죄 등이 인정되지 않으며, 그들의 자백은 불법 구금과 고문을 자행한 끝에 얻어낸 허위라며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문 전 대통령은 인사말에서 "광주사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바로잡혔지만, 사북사태는 여전히 신군부가 지어낸 편견의 언어와 이미지 속에 남아 있다"며 "한국 현대사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라고 밝혔다.
그는 "사북노동항쟁이야말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 앞선 우리나라의 대중적 노동운동의 효시였지만, 투쟁 과정에서 벌어졌던 여러 과오와 논란으로 오랫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참여정부 시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 활동을 통해 사북 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고, 재심과 무죄 판결로 이어진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문 전 대통령은 "영화가 그 자체로 아주 잘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서로 대립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모두 담아내고, 진정한 화해의 길을 열기 위해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 관객들의 몫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유사한 여러 사례들의 문제 해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평가했다.
황인욱 소장은 평산책방지기인 문 전 대통령에게 사북 광부들의 아픔을 기억해달라는 뜻으로 사북항쟁사진첩 '검은 눈물'을 전달했다. 상영이 끝난 뒤 문재인 전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이날 상영회에는 양산시민 100여 명이 함께했다.
시민상영위원회는 지난 2일 사북 항쟁을 기억하고 국가의 사과를 촉구하는 '늦은 메아리' 운동을 선언하고, 국회 의원회관 특별상영회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순회 상영회를 진행하고 있다. 상영회는 내년 4월까지 이어진다. 상영회 정보는 1980사북 특별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