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인공지능(AI)과 첨단 반도체 기술 발전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 메모리(ㅊ)의 대중국 수출을 전면 차단하는 규제를 발표했다. 이는 중국의 첨단 기술 개발 능력을 제한하고 미국의 국가 안보를 강화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한국 대기업을 비롯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2일(현지시각)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첨단 무기 시스템, AI, 고성능 컴퓨팅 등에 사용될 수 있는 첨단 반도체 기술이 중국에 의해 악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고 규제 배경을 밝혔다. BIS는 이번 발표를 통해 “중국의 첨단 AI 개발 속도를 늦추고, 반도체 생태계의 성장을 억제하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고 명확히 했다.
규제의 주요 내용과 중국 견제 전략
미국 정부가 발표한 이번 규제 패키지는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24가지 장비와 3가지 소프트웨어 도구에 대한 수출 통제 △HBM의 대중국 수출 제한 △규정 준수를 위한 적신호 지침 도입 △중국 관련 140개 단체를 수출 제재 명단에 추가 및 14개 기업 수정 △기존 규제 효과를 강화하는 규정 변경 등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HBM에 대한 새로운 수출 제한이다. HBM은 고성능 데이터 처리를 위해 D램을 여러 층으로 쌓아 만든 메모리로, AI 기술 발전의 핵심 부품으로 꼽힌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이 시장에서 미국의 마이크론과 함께 세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 조치로 한국 기업들이 중국 시장에서 입을 타격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HBM 외에도 미국은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와 기술의 수출을 전면적으로 규제하기 위해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을 적용했다. FDPR은 미국산 소프트웨어, 장비, 기술이 활용된 제품이라면 생산 국가와 관계없이 규제를 따라야 한다는 원칙이다. 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다양한 국가에서 제조된 반도체 장비와 제품이 이에 포함된다.
BIS는 이번 조치를 통해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장비들도 광범위하게 통제하고 있다. 이들 장비는 리소그래피, 이온 주입, 증착, 어닐링 등 첨단 공정에 필수적이며, 해당 장비가 중국에 수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제한이 대폭 강화됐다. 반면 일본과 네덜란드는 이번 규제에서 제외된 것으로 전해졌다.
미-중 갈등 속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 강경책
이번 발표는 바이든 행정부의 세 번째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다. 로이터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강력한 대중국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이번 조치는 특히 지난달 페루 리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만난 뒤 나온 것이어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당시 시진핑 주석은 미국의 수출 규제를 “작은 마당, 높은 울타리”라고 비판한 바 있다. 미국 상무부는 이번 발표에서 이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며 “미국의 전략은 중국의 군사 현대화와 인권 탄압에 핵심 기술이 사용되는 것을 제한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로이터는 미국의 이번 조치가 단순히 기술 규제를 넘어 중국의 경제 성장과 군사적 부상을 견제하기 위한 보다 포괄적인 전략의 일환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이번 발표로 인해 중국은 반도체 생산에서 필수적인 장비와 기술을 확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등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미칠 영향
HBM 시장은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마이크론 등 소수의 글로벌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이번 규제는 중국을 주요 수출 시장으로 삼아온 한국 기업들에 직격탄이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중국 내 반도체 생산 공정을 운영하는 한국 기업들은 이번 규제로 인해 사업 전략을 재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HBM 규제 외에도 반도체 제조 장비 수출 제한이 글로벌 시장에 미칠 파장은 클 것으로 보인다. BIS는 특정 식각, 증착, 리소그래피 등 첨단 공정 기술이 포함된 장비가 이번 규제의 대상이 됐다고 밝혔다. 이러한 제한은 중국 내 반도체 제조 공정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로이터는 “중국의 반도체 제조 생태계는 미국의 규제로 인해 점차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중국의 반발과 향후 전망
중국 상무부는 미국의 이번 조치에 대해 즉각 반발하며 “미국의 규제는 불공정하며 중국의 권익을 해치는 행위”라면서 “필요한 조치를 통해 중국의 권리를 강력히 보호하겠다”고 경고했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이번 조치는 미국의 동맹국들과 협력해 중국의 첨단 기술 발전에 치명타를 가하기 위한 표적 접근의 결과물”이라고 평가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미국은 기술이 국가 안보를 위협하지 않도록 선제적이고 공격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규제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 중국, 미국이 얽힌 복잡한 반도체 공급망 속에서 한국 기업들이 어떤 전략을 통해 위기를 극복할지가 관건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이번 규제로 인한 영향을 최소화하려면 기술 개발과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