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2달이면 정리될 줄" '나쁜 나라' 김진열 감독 인터뷰

2015-10-08 16:53

“여기 아직 사람이 있다!”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

“여기 아직 사람이 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맹골수도 인근. 길이 145m, 폭 22m, 921명 정원에 구명보트 46대가 달린 여객선이 속절없이 침몰했다.

여객선 이름은 ‘세월호’. 탑승 인원 476명 가운데 295명이 사망했다. 9명은 아직 차가운 물 속에 있다. ‘역대급’ 참사를 두고 각계에서 말들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누군가는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빗댔다. 누군가는 “북한 소행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누군가는 “꼭 불행만은 아니다”라고 긍정했다. 누군가는 ‘국민 의식이 부족해 이렇게 됐다“고 미개한 국민성을 꼬집었다.

누군가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참사”라고 통탄했다. 누군가는 “해당 선박 제작사 잘못”이라고 목소리 높였다. 누군가는 “세월호 선장 책임”이라고 선을 그었다.

누군가는 “대한민국”이라고 말했다.

29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나쁜 나라’는 세월호 참사 후 1년, 그 시간을 돌아보는 영화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나쁜 나라’가 됐는지, 이 과정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은 어떤 시간을 버텨왔는지 기록했다. 지난 6일, 영화를 연출한 김진열(42) 감독을 위키트리에서 만났다. 그는 1년간 유가족과 함께하며 그들의 모습을 빠짐없이 담았다.

제목이 꽤 도발적이다.

그게(‘나쁜 나라’) 우리가, 유가족이 1년간 마주한 국가 모습이었다. 국가는 계속 유가족과의 약속을 저버렸다. 영화에서 유가족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이게 나라냐”다. 특별법(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며 국가는 유가족을 배신하고, 믿음을 저버렸다. 국가보다 ‘나라’라는 말을 유가족이 더 잘 쓰는 경향이 있어서 ‘나쁜 국가’ 대신 ‘나쁜 나라’로 제목을 붙였다.

영화 시작이 단원고 생존자 아이들의 등교 장면이다.

프롤로그는 영화에서 상징적 부분이다. 프롤로그를 놓고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다. 세월호 국정조사 장면으로 가자. 아니다, 가족들이 거리로 나선 장면을 보여주자.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하지만 결국 등교 장면을 택했다.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게 바로 생존자 아이들의 첫 등교 장면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시간순으로 사건을 배열하는 데 효과적일 것도 같았고.

'나쁜 나라' 김진열 감독

영화에서 ‘유민 아빠’ 김영오 씨가 “이러니 ‘유족충’ 소리를 듣지”라며 자조적으로 말하는 장면이 인상 깊다. (김 씨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로 향하다 제지를 받자 “어떻게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하느냐”며 이렇게 말한다)

가족들이 휴대전화로 계속 뉴스를 본다. 댓글을 보고 많이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던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악성 댓글 달리는 데는 보지 마라’고 넘길 정도로 익숙해졌다. ‘유족충’ 이라 막말을 일삼는 사람이 다수가 아니란 걸 이해한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에는 굉장한 좌절감을 느꼈다.

개봉 전부터 누리꾼들에게 별점 테러를 당했다. (8일 오후 3시 기준 1.56점 - 네이버 영화)

별점 테러를 당했나? 잘 모른다. 도대체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굴까. 만나서 이들을 한번 기록하고 싶다. 나는 이들이 우리 옆에 있는, 그런 사람이라 생각한다. 별로 개의치 않는다.

촬영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뭔가.

유가족들과 함께 진도 체육관에 내려갈 때였다. 가족들은 내가 누군지 몰랐다. 앞에 계신 한 아버님이 김밥을 챙겨주시고 호두과자까지 주셨다. 진도에 거의 다 도착하니 조심스레 묻더라. “몇 반 어머니시냐”고(웃음). 제가 그분들과 동년배 즈음된다. (아니라고 말씀드렸더니) 서로가 당황했지만, 오히려 그런 일들로 유가족들과 더 친해졌다.

이하 다큐멘터리 '나쁜 나라'

촬영하며 가장 분노했던 순간이 있다면.

‘열린 국회 비전 선포식(2014년 7월 17일)’ 때였다. 2014년 7월 15일, 정의화(무소속) 국회의장에게 시민 350만 명 서명을 전달했다. 정 의장은 그날 유가족들을 만나 본인도 국회의원들과 함께 노력하겠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이틀 뒤, 제헌절이었다. 오후에 음악회(‘열린 국회 비전 선포식’)가 열린다고 하더라. 다들 설마, 설마하며 안 열릴 거로 생각했다.

국회 안에서 유가족들이 단식 농성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참사가 일어난 지 채 100일도 안 된 상황이었다. 정 의장은 아이들을 애도하는 음악회라고 해명했지만, 가족들과는 전혀 감정적으로 맞지 않은 행사였다. 가족들도 엄청나게 분노하고, 저도 분노했다. 자식을 잃은 가족이 단식 농성까지 벌이는데, 이 사람들은 전혀 다른 시스템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중간에도 나오지만, “유가족이 과도한 배상을 받는다”는 논란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언론이 이 문제를 제기할 때,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반응(과도한 배상)이 나올 거라 어느 정도 예측했다. 그전에도 약간의 (여론) 물타기, 가족들 힘 빼기용으로 (배, 보상 문제를) 활용할 거라 생각했고. 유가족은 이 문제가 자신들을 이렇게까지 코너로 몰아갈지 짐작 못했을 수 있지만, 취재하는 분들이나 시민들은 거의 예상했다. 그래서 (비난이) 그렇게 충격 받거나, 고민하고 이러지는 않았다.

촬영하면서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뭔가.

‘나쁜 나라’는 내가 책임연출을 맡고 공동연출 두 분, 촬영 담당 두 분과 함께 완성한 영화다. 영화를 만들기 전, 저희끼리 이 주제(세월호)를 갖고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세월호 참사가 이렇게 장기화할 줄 몰랐다. 사실 2014년 6월쯤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 생각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보니 작업을 기획하기 보다는 가족들 움직임을 자연스레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촬영이 길어지면서 가족들과 적절한 ‘거리 두기’를 해야 했다. 유가족 활동 전체를 기록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기획했지만, 사적이다 싶으면 더 안 들어갔다. (만약) 들어가면 (내가 더)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영화 다 찍고 편집한다고 하니, 아는 기자들하고 영화인들이 ‘절대 혼자서는 하지 마라’고말렸다. 편집하다 우울증 걸린다고(웃음). 참사현장 취재는 처음인데, 해외에서 참사 취재를 다녔던 분 얘기를 들어보니 세월호는 좀 특수한 게 있다고 했다. 외국은 ‘천재지변’이라 어떻게 손 쓸 수 없었다는 생각에 (비교적) 쉽게 체념이 되는 데, 이건 (할 수 있는데도) 아무것도 못 해보고 죽은 거잖나. 유가족들이 내부적으로 강한 죄의식을 갖는 이유기도 하고.

유가족들의 욕설과 격앙된 모습이 여과 없이 나온다.

사실 유가족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내부적으로 규칙까지 만들었다. 짧은 시간 내에 언론이 본인들을 어떻게 이미지화하는지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유가족들의 정서나 맥락 상 (이 정도 장면은) 노출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부분만 도드라지게 보고 비난하거나 이런 일은 없을 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유민 아버지가 욕설하는 부분에선 조금 고민이 됐다. 2014년 출간된 유민 아버지 책(‘못난 아빠가’)을 보면 자기가 그날(청와대 방문 저지) 처음 욕을 했다고 나온다. 단식에, 단순한 편지 한 통 전달도 안 된다고 하니 굉장히 예민해진 상황이었고.

근데 그게 퍼져 SNS 공격을 받으니 버티기 힘들었다더라. 영화 속 장면이 다시 유민 아버지를 부정적으로 인식시키지 않을지 걱정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가족이라고 늘 슬픔만 갖고 사는 건 아니니까.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올해 4월에 이 영화를 완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잘 안됐다. 마음이 조급했던 이유는 유가족들에게 어서 ‘힘’이 되고 싶어서였다. 힘이 뭐냐면 결국 ‘시민’이다. 가족들과 함께 해주는 시민 말이다. 가족들 옆에서 가장 많이, 가장 절실히 봐왔다. 세월호 유가족은 잊힌 사람이 아닌, 여전히 기억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런 게 큰 ‘힘’이다.

이 영화로 관객들이 유가족과 좀 더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생기면 좋겠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의미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그게 바로 큰 힘이다.

home 양원모 기자 story@wikitree.co.kr